러일전쟁 당시 한성을 점령한 일본군을 묘사한 프랑스 신문 <르 프티 파리지앵(Le Petit Parisien)>(1904년 2월 28일 자) 표지에 실린 삽화
소장 유물 이야기

모습을 드러낸 은자의 나라,
서구의 시선으로 본 개항기 조선

조선을 ‘은자의 나라(The Hermit Nation)’ 또는 ‘고요한 아침의 땅(The Land of the Morning Calm)’이라고 부르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언뜻 조용하고 신비한 존재로 한반도를 설명하는 듯한 이 표현은 역설적이게도 ‘은자의 나라’의 존재가 서양 작가들에게까지 알려지면서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서양인의 동양관(東洋觀)은 직접적인 방문과 경험을 통해서만이 아닌, 당대의 출판물을 통해 형성된 막연한 이미지의 결과물이기도 했다. 즉 당시 서구의 매체들은 동양을 소개하는 하나의 창(窓)임과 동시에 당시 서양의 동양관이 실체로 구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의 눈에 비친 조선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소장한 개항기 서구의 인쇄물을 통해 확인해보자.

생생하고 빠른 매체의 등장

때는 바야흐로 19세기, 항해술의 지속적인 발달과 산업혁명으로 발전한 유럽 국가들의 교역 확대, 식민지를 확보하기 위한 각축이 절정에 달하던 때였다. 강대국들은 ‘문명 바깥의 세계’에 대한 경험과 거기서 거둔 성과를 안팎으로 알리고자 했고, 여기에 큰 역할을 한 것이 인쇄 매체와 언론이었다. 당시 글자판의 표면을 깎지 않아도 되는 평판인쇄 개발과 인쇄용 잉크의 발전은 이전보다 다양한 소식을 많은 분량으로, 빠르게 생산해낼 수 있도록 해 인쇄물의 대중화를 가속화했다. 이 시기 대중적인 인쇄물의 콘텐츠 역시 성장했는데, 사진 기술이 발전하며 인화 시간이 단축되고 대량 복제가 가능해지면서 사진을 인쇄물에 적극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기술들을 이용해 정보 전달 효과를 극대화한 것이 시각 자료가 첨부된 인쇄물이었다. 1842년 영국에서 발간된 화보 잡지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The Illustrated London News)>를 시작으로 프랑스의 <일뤼스트라시옹(L'Illustration)>, <르 프티 주르날(Le Petit Journal)> 등 화보 잡지와 신문이 잇달아 19세기 서구 여러 나라에서 발간되기 시작했다. 이 인쇄물들은 주로 1면과 맨 마지막 면에 정교한 삽화를 넣어 안쪽의 기사로 관심을 유도했다. 삽화는 서유럽의 크고 작은 사건을 주된 화제(畫題)로 삼았지만, 유럽 외 지역의 소식 역시 외부 세계에 대한 독자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높은 빈도로 채택했다. 동아시아 역시 예외는 아니었는데, 오랜 세월 미지의 영역으로 존재하다가 문호를 개방한 이방인들의 모습을 묘사한 삽화와 사진, 동양의 역사와 문화를 간단하게 소개하는 기사, 여행가들의 기행문은 인쇄물의 주된 소재였다. 이러한 당대 서구의 신문 기사는 아시아에 대한 서구의 인식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인 동시에 당시 조선의 모습을 보여주는 희귀한 자료로서 높은 가치가 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 <일뤼스트라시옹>, <르 프티 주르날>을 비롯해 조선에 대해 소개한 19세기 유럽의 인쇄물을 다수 소장해 이를 관람객에게 공개하고 있다.

‘한국의 돌싸움(Les Combats de Pierres, en Corée)’ 이라는 제목의 기사와 삽화를 통해 석전(石戰)을 소개한 프랑스 주간지 <주르날 데 보야주(Journal des Voyages)> (1903년 1월 4일 자)
조선 수신사(修信使) 일행의 일본 방문을 묘사한 삽화를 실은 영국 주간지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 (The Illustrated London News)> (1876년 8월 26일 자)
고종 강제 퇴위에 반발하는 한성의 조선인들을 진압 하는 일본군을 묘사한 프랑스 신문 <르 프티 주르날 (Le Petit Journal)> (1907년 8월 10일 자) 뒤표지 삽화
그대로 드러난 수난사

그러나 서구의 근대 문명이 남긴 조선 관련 자료는 한국인으로서 담담하게 받아들이기 힘든 역사적인 비극을 함축하고 있다. 아편전쟁을 통해 서구 문명의 위력을 실감한 청나라와 일찍이 서구식 개혁을 채택한 일본 사이에서 지역 패권 다툼에 휘말린 조선의 수난은 동아시아의 정치적 소용돌이를 관망하던 서구 언론에 의해 그대로 묘사되었다. 두 차례 양요(洋擾)에서 국권 피탈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주는 그림이나 사진에서 주인공은 한반도의 패권을 다투는 열강이었고, 조선은 서구 문명 속에서 방황하는 기이한 행색의 미아 같은 존재로 타자화되었다.

그림과 사진으로 만나는 한국 근대사의 초입은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한다. 당시의 신문은 조선 사람들의 의도와 관계없이 한반도의 운명이 결정되는 모습을 그림 몇 장으로 요약했다. 그로부터 10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난 지금, 짧은 평화 무드가 끝나고 다시금 긴장 국면으로 향하는 현재의 한반도 정세는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호국 보훈의 달 6월을 맞아 호국 영령과 순국선열의 희생과 애국정신을 기리는 한편, 시대의 부산물에 새겨진 비극과 그것을 반복하지 않을 선택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글. 자료관리과 조유재 학예연구원
참고 자료. 자오성웨이·리샤오위 <주르날 제국주의>, 현실문화연구, 2019 /
나애리 <1907년 프랑스 신문에 나타난 한국과 한국인들의 이미지>, 프랑스문화연구 제11집,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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