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수아르> 1950년 9월 2일 자
아름다운 공유 기증

한국전쟁을 프랑스에 알린 일간지
<프랑스수아르>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품 중에는 외국인의 기증품도 있다. 프랑스인 피에르 오리(Pierre Ory)가 기증한 한국전쟁 기사가 실린 일간지 <프랑스수아르(France-soir)>도 그중 하나다. 기증자는 처음에 이 신문을 프랑스 대사관에 기탁했으나, 한국과의 교류 증진을 바라며 2015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예상치 못한 전쟁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북한은 38선 전역에서 공격을 시작했다. 정부 수립 후 한국과 북한은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지 않고 각각 ‘북진통일(北進統一)’과 ‘국토완정(國土完整, 남진통일)’을 주장하며 38선 부근에서 군사적 충돌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 공격이 38선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던 전투라고 여겼는지, 서울의 미군 라디오 방송국은 이 상황이 대규모 공격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니 동요하지 말라고 방송했다. 그러나 오전 9시경 당시 한국에 속해 있던 개성이 함락되었고, 저녁에는 북한의 전위부대가 서울에 도달했다. 한국과 미국이 북한의 대규모 공격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점은 6월 25일 오후 3시 주한 미국 대사 존 J. 무초(John J. Muccio)가 미 국무부에 보낸, 탄약이 급히 필요하다는 내용의 전보로도 알 수 있다.

남쪽으로 밀려나는 전선

미국은 즉각 전쟁에 개입했다. 6월 27일 미 공군 참전을 시작으로, 7월 1일 일본에 주둔하던 미 8군 예하 제24보병사단이 한국에 상륙했다. 미군의 도움에도 전세는 쉽사리 바뀌지 않았고, 전선은 점점 한반도 남쪽으로 밀리고 있었다. 대전을 지키기 위한 전투에서 미 8군 예하 제24보병사단 병력의 약 30%가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었고, 일부는 전쟁 포로가 되었다. 포로가 된 미군 중에는 사단장 윌리엄 F. 딘(William F. Dean) 소장도 있었다. 무서운 기세로 내려오는 북한군을 피해 남쪽으로 후퇴하던 한국 병사와 미국 병사 사이에서는 심리적 공황 상태가 나타났다. 일부 병사는 후퇴하면서 무기를 버리고 가능한 한 빨리 남쪽으로 도망치려고 했다. 미국 의무대 기록에 따르면 1950년 9월까지 병사들 사이에 심신 쇠약, 무감각, 두려움, 불면증 등 정신 질환이 급격히 증가했다고 한다.

<프랑스수아르> 1950년 9월 3일·4일 자
<프랑스수아르> 1950년 9월 6일 자
<프랑스수아르> 1950년 9월 13일 자
1950년 7월 유엔군 참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로 7월, 21개국이 참전했다. 이미 참전하고 있던 미국 외에 15개 국가가 전투병을 파병했고, 덴마크·인도 등 5개 국가가 의무병을 보냈다. 8월 4일에 이르러서 포항·대구·마산으로 이어지는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 방어선을 뚫기 위해 약 7만 명의 북한군은 8월(1950년 8월 4일~25일)과 9월(1950년 9월 1일~15일) 두 번에 걸쳐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수차례 공방전이 전개되었고, 곳에 따라서는 방어선이 뚫릴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낙동강 전선의 상황을 보여주는 기증품

피에르 오리의 기증품은 1950년 9월 1일부터 13일까지의 프랑스 일간지 <프랑스수아르>로, 엎치락뒤치락하던 낙동강 전선의 상황을 보여준다. 기증품에는 포항과 낙동강 유역의 대구·창녕·마산을 공격하는 북한군, 낙동강 방어선 밖에 있던 함안·영천을 탈환하기 위해 공격하는 유엔군, 미 공군 전투기가 소련 전투기를 격추시킨 내용 등 전선의 상황을 알려주는 기사뿐 아니라 길가에서 우는 아이의 사진도 실려 있어 낙동강 전선의 급박함과 전쟁의 참상을 전해준다.

방어하는 입장에서 공격하는 입장으로 전환

전쟁은 1950년 9월 15일 실시한 암호명 ‘크로마이트’ 작전으로 전환점을 맞이한다.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약 7만 명의 유엔군과 230척의 선박을 동원해 인천을 공격하여 되찾았다. 이것이 인천상륙작전이다. 그 후 유엔군은 북한군을 뚫고 인천·서울로 향했다. 9월 28일, 유엔군과 한국군은 북한군에 점령당한 지 세 달 만에 서울을 탈환했다. 이후 전선은 빠른 속도로 북상해 10월 1일부터 북한 지역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0월 18일 중국군의 참전으로 전선은 다시 38선 인근으로 밀려나 1953년 7월 휴전이 이루어질 때까지 전투가 지속되었다.

세계사 속의 한국전쟁

한국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다음으로 비용이 많이 든 전쟁이며, 냉전 시대에 세계의 주요 강대국이 모두 참전한 국제적 전쟁이었다. 전쟁의 상흔은 한반도와 한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뿐 아니라 유엔군과 중국군에도 남았다. 유엔군은 수만 명이, 중국군은 20만 명이 전쟁 중 사망했다. 치열했던 낙동강 전선 상황을 프랑스에 알린 <프랑스수아르>는 이러한 한국전쟁의 국제적 성격을 보여준다. 피에르 오리의 기증품은 우리의 아픈 역사를 세계사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게 도와준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 역사를 ‘기증’하세요

    자료 기증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시작입니다. 대한민국은 숱한 고난을 겪으며 많은 자취를 남겼고, 자취는 자료로 남아 역사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국민 여러분의 체취가 묻어있는 기증 자료는 대한민국이 걸어온 흔적과 국민을 하나로 묶어주는 고리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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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2010년 개관 준비를 하기 위해 자료를 기증받기 시작한 이후 2018년까지 387명의 개인 또는 단체로부터 6만3872점의 자료를 수증했습니다. 박물관에 자료를 기증해주신 모든 분께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 기증 안내

    대상
    개항부터 현재까지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조망할 수 있는 관련 인쇄물과 사진 등의 기록물, 유품, 기념품, 생활용품 등의 역사 자료.

  • 절차

    1 기증 의사 접수 ┃ 기증 안내 및 자료 조사

    1 자료 인수 ┃ 내부 검토 후 자료 인수, 기증원 접수

    1 수증 심의 ┃ 수증 심의 개최, 탈락 자료 반환

    1 수증 및 국가 귀속 ┃ 수증 증서 발급, 자료 등록

1문의 ┃ 02-3703-9308, 9237

글. 자료관리과 권강미 학예연구원
참고 자료. 김육훈 <살아 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휴머니스트, 2011 / 베른트 슈퇴버·한성훈 <한국전쟁>, 여문책,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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