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학술대회
세계와 만나는 박물관Ⅰ

국제학술대회 ‘세계 역사박물관의 현대사 기점 논쟁’

해외 현대사 박물관 사례를 통해
‘현대’의 역사적 의미를 성찰하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4월 25일(목)부터 26일(금)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세계 역사박물관의 현대사 기점 논쟁’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세계 주요 현대사 박물관 건립 과정과 현대사 기점 구분을 둘러싼 다양한 사회적·학술적 논쟁 사례를 알아보고 현대사 박물관이 나아갈 방향을 찾아가는 기회가 되었다.

해외 7개국 역사박물관의 논쟁 사례 발표

역사박물관 설립은 전 세계적으로 1990년대부터 시작된 사회적 현상이다. 이들 역사박물관의 설립 배경에는 국민국가의 정체성,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냉전으로 집약되는 20세기 역사, 그리고 탈식민주의에 대한 성찰이 자리 잡고 있다. 역사박물관이 설립될 때에는 어느 곳에서나 큰 사회적 논쟁이 일었다. 현대사 박물관으로서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번 국제학술대회에서는 해외 7개국 역사박물관 관계자가 각국에서 현대사 박물관 설립과 전시 내용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에 대해 발표했다.

‘유럽 역사의 집’ 수석 큐레이터 안드레아 모륵(Andrea Mork)은 유럽 역사의 집을 ‘유럽 기억의 저장소’라고 말한다. 유럽 역사의 집이라고 하면 ‘이것이야말로 유럽이다!’라고 단일한 정체성을 보여줄 것 같지만, 사실 유럽은 실체가 분명하지 않고 오히려 언제나 논쟁거리였다. 유럽 역사의 집은 유럽 역사를 명쾌한 하나의 서사로 들려주기보다는 비판적이고, 때로는 모순적으로까지 보일 만큼 다양성과 복합성으로 제시하였다. 전시가 주목하는 시기는 주로 1945년 이후의 유럽 통합이지만 19세기를 중요한 출발점으로 본다. 그 이유는 19세기가 근대적 사상과 제도가 발전한 시기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 시대 자체가 유럽의 시대라 할 만큼 유럽의 영향력이 큰 시기였기 때문이다. 유럽 역사의 집이 유럽의 정체성에 대한 논쟁을 정리하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논쟁을 추동하기를, 그래서 유의미한 질문이 이어지기를 바란다는 모륵의 말은 역사박물관의 역할을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독일연방공화국 역사의 집’은 아마도 20세기 이후 현대사 박물관의 전형이라 할 만큼 여러 가지 시사점을 주는 사례다. 1982년 콜 수상이 처음 제안한 이후 12년이 지난 1994년에야 개관할 수 있었던 것은 현대사 박물관의 필요성에 대한 논쟁뿐 아니라 1980년대가 독일 지성사에서 역사 논쟁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전시는 1945년 이후부터 현재까지 다루고 있기에 최근 유럽에서 큰 이슈가 되었던 난민 문제까지도 포괄하고 있으며, 나치의 홀로코스트에 관한 것도 전사(前史)로서 포함한다. 독일연방공화국 역사의 집은 설립 당시 참조할 만한 현대사 박물관이 없었고 소장품도 없었다. 그렇기에 더욱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고, 유물 수집과 처리까지 직원들이 직접 참여했다. 독일연방공화국 역사의 집은 독립성과 자율성을 제도적 장치로 보장한다. 정치적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 연방 정부 및 의회의 각 정당이 동수로 참여하는 이사회를 두고 있으며, 학계 전문가로 구성된 학술 자문위원회를 구성해 학문적 자율성을 확보한다. 또 사회단체 협의회를 통해 관람객과 끊임없이 소통한다.

국제학술대회 단체사진

‘오스트리아 역사의 집’은 가장 최근에 개관한 현대사 박물관으로, 1919년의 공화제 설립 100주년을 기념하며 2018년 11월에 문을 열었다. 오스트리아에서 역사의 집 건립 논의는 1980년대 말부터 간헐적으로 제기되다가 2000년대에 본격화되어 2015년에 입법이 이루어졌다. 전시는 1919년부터 현재까지 다룬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조합, 공공 역사 등 최근 역사박물관의 성과를 구현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특히 관객 참여를 보장하고 유도하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개관 전시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 속으로: 1918년 이후의 오스트리아>에는 평범한 사람들이 직접 보내온, 오일쇼크 기간에 어떻게 지냈는지를 볼 수 있는 사진이 전시 오브제로 사용되고 있고, 전시 마지막 부분 ‘무엇이 싸울 만한 가치가 있는가?’를 완성하는 것 또한 관람객이 붙인 수많은 메모지다. 디지털 큐레이터 슈테판 베네디크(Stefan Benedik)는 ‘오스트리아공화국으로서 과연 현대사 박물관이 필요한가?’는 지금도 여전히 정치적 논쟁이 되고 있다면서, 그렇기에 과정으로서의 현대사 박물관을 강조한다. 오스트리아 역사의 집은 법률적 규정이 토론의 장으로 되어 있고, 그에 따라 한 방향으로 교육을 제공할 수 없고 다양한 관점을 모을 수 있는 토론의 장 역할이 부여된다.

‘헝가리 테러의 집 박물관’은 20세기 헝가리 국민에게 공포와 고통을 안겨준 두 가지 전체주의, 즉 나치와 공산주의의 역사를 직면하는 곳이다. 박물관이 들어선 곳도 나치 화살십자당의 근거지이자 공산당 정치경찰의 고문실과 형무소로 사용한, 헝가리 국민이라면 누구나 그곳이 ‘공포의 집’임을 아는 바로 그 건물이다. 이 박물관은 사진전 <가해자의 벽>같이 현재도 본인 또는 가족이 생존해 있는 민감한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치며, 아직까지 교과서에 실리지 못한 이야기를 다룬다. 슈미트 마리아(Schmidt Mária) 관장은 이 박물관이 “연구기관과 기념물로서의 성격”을 함께 지니고 있기 때문에 “지난 17년간 헝가리 인구를 상회하는 1000만 명 가까운 관람객이 다녀갔다”고 말한다.

‘러시아 국립현대사박물관’ 또한 현대 또는 근대의 시작점에 대한 많은 논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현재 상설 전시는 1861년 농노제 폐지부터 시작하고 있지만, 1917년에 일어난 10월 혁명과 1985년에 실시한 페레스트로이카 또한 러시아 역사에서 ‘현대’의 의미를 성찰하는 데 중요한 기점이다. 실제로 현재의 박물관은 2014년에 재개관했지만, 러시아에서 현대사 박물관의 효시는 1917년 2월 혁명 기간 중 모스크바에 설립된 혁명박물관이다. 소비에트연방 해체 후 문을 닫고 고르바초프나 옐친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등 격동의 역사만큼이나 ‘현대사의 정치화’와 관련해 치열하게 고민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신해혁명박물관’은 신해혁명 100주년을 기념해 2011년 우한에 세운 곳이다. 중국 역사학계에서 현대사 기점 또한 1911년 신해혁명과 1919년 5·4운동 그리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이 지속적으로 논쟁의 대상이었다. 게다가 현대사에서 양안 관계까지 고려하면 논쟁은 간단하지 않다.

마지막으로 ‘일본 국립역사민속박물관’은 1983년에 개관했지만 박물관 내에 현대 전시실을 연 것은 2010년의 일이다. 전시에서 다루는 시기는 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다. 박물관의 히우라 사토코(樋浦鄕子) 교수는 개관 당시 현대 전시실이 보류되었던 것은 현대사에 대한 논쟁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 현대 전시실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오키나와의 ‘집단 자살’ 사건을 다루었을 때의 사회적 논란 역시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인 현대를 역사 서사로 풀어내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각 발표에는 국내 역사학자가 지정 토론을 맡았다. 해당 박물관을 방문해본 것은 물론 각 박물관의 논쟁사에 대해 이미 연구 성과를 발표한 바 있는 신종훈 경상대 교수와 윤용선 한성대 교수, 김지영 숭실대 교수,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 하세봉 한국해양대 교수, 김인덕 청암대 교수 등이 토론에 참여해 각국 현대사 박물관 논쟁사를 더욱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게 했고, 한국 역사학계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지니는 함의를 짚어주었다.

글. 연구기획과 하정옥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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