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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 자료 이야기

조선의 화력 강화도를 지킨 화포,
‘불랑기포 계축명 4호’

조선시대의 대형 화약무기는 소형 화약무기보다 강력한 파괴력과 먼 사거리를 확보하기 위해 제작되고 운용되었다. 대형 화약무기에는 소형 무기에 비해 훨씬 많은 화약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화약량의 증가에 따라 폭발력을 견딜 수 있는 견고한 금속제 무기 제작 기술이 필수적이었다. 또한 목표물을 더 큰 파괴력으로 정확하게 맞히는 기술 역시 무기 발전의 핵심 과제였다. 이 글에서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소장 중인 ‘불랑기포 계축명 4호’의 역사적 가치와 과학적 비밀을 살펴보고자 한다.

불랑기포 계축명 4호

불랑기포 계축명 4호

불랑기포의 세부 명칭(출처: 국립진주박물관, 「조선무기 조사연구 보고서Ⅱ」)

불랑기포의 세부 명칭
(출처: 국립진주박물관, 「조선무기 조사연구 보고서Ⅱ」)

대형 화약무기의 등장과 발전

조선은 건국 초부터 남쪽의 왜구와 북쪽의 여진족 침입을 막아내기 위해 화약무기를 끊임없이 개발했다. 국경 지역에서 분쟁이 일어날 때마다 무기 개발의 필요성은 더욱 커졌으며, 특히 1555년 을묘왜변 이후 조선 조정은 대형 총통을 활발히 제작했다. 이 시기에 제작된 대형 총통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의 주력 화약무기로 활약했는데, 왜선을 바다에서 격파하는 데 초점을 맞춘 무기 체계였다는 점에서 이후 등장하는 화포들과는 성격이 달랐다. 조선은 임진왜란 당시 평양성 전투 등에서 명군이 운용한 불랑기(佛狼機)의 뛰어난 위력을 목격한 후, 이를 국방의 핵심 화기로 적극 채택하고자 했다. 실제로 훈련도감 포수 시험 과목에도 불랑기포가 호준포·삼안총 등과 함께 포함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1605년(선조 38) 여진족 홀라온(忽剌溫)이 함경도 온성으로 침입해 오면서 더욱 뚜렷해졌다. 조정에서는 방어를 위해 화기를 급파하는 한편, 함경도 각 진보에 남아 있던 노후 총통들을 거두어 남북의 도회로 나누어 보낸 뒤, 장인(匠人)과 함께 불랑기 견양을 보내 불랑기를 제작하도록 했다. 이는 전통 총통류를 대신하여 불랑기가 조선군의 주력 화약무기 중 하나로 공식 등장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사건이었다.
병자호란(1636년) 당시 강화도가 함락되는 뼈아픈 경험을 한 조선은 불랑기포의 중요성에 주목하게 되었다. 현종과 조정 신료들의 대화를 살펴보면, 조선 조정은 강화도를 지키는 군사들의 사격 훈련을 강화하는 한편, 불랑기포 등 자주 쏠 수 있는 화포를 제작하여 방어책을 마련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조정은 통제사 정부현(鄭傅賢)에게 불랑기 4호·5호 50위(位)와 정철자포(正鐵子砲) 200문, 잠철(鐕鐵) 100개에 더해 위(位)마다 족철(足鐵) 1개씩을 만들어 강화도로 보내게 했다. 그 결과 1664년에 강화도는 244좌라는 많은 수의 불랑기포를 보유하게 되었다. 이후에도 강화도에서는 여러 불랑기포가 제작되었는데, 이번에 소개할 계축명 4호도 그중 하나이다.

불랑기포란 무엇인가?

대형 화약무기는 단순한 파이프(pipe) 형태의 금속 포신에 화약을 넣고, 심지에 불을 붙여 발사하는 원리로 제작된다. 이러한 무기는 유통식(有筒式) 또는 관형(管形) 화기로 분류된다. 포강(砲腔)은 화살이나 탄환 같은 발사체가 통과하는 포신 중앙의 빈 공간이며, 포구(砲口)는 포신의 앞쪽을 가리킨다. 불랑기포는 발사틀의 구실을 하는 모포(母砲) 와, 실탄을 장전해 모포에 삽입·발사하는 자포(子砲)로 이루어진 화약무기이다. 불랑기포는 포신이 두꺼워 기존 총통보다 더 안전했다. 가늠자와 가늠쇠가 있고, 포이(砲耳)를 통해 발사 각도를 조정할 수 있어 정밀한 조준 사격이 가능했다. 또한 4~6개의 자포를 번갈아 장전하여 사격 준비 시간을 줄여 연사력을 향상시켰다.

명문으로 읽는 계축명 4호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 불랑기포 자포실에 다음과 같은 명문이 새겨져 있다.
癸丑八月日鑄造 四號佛狼機第一百四十七重九十七斤 監鑄官前僉使申起立 本府軍官前萬戶金得完 色吏宋之○(?) 匠人金愛立
대형 화약무기에 남아 있는 명문은 제작 연도, 제작 주체, 상납 주체, 화약무기의 무게와 크기, 화약량 등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다. 이러한 정보를 통해 해당 화약무기를 누가, 언제, 어디에서, 왜 제작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이 명문은 “계축년(1673) 8월 일에 주조했다. 4호 불랑기 제147호로 무게는 97근이다. 감주관(監鑄官)은 전 첨사 신기립(申起立)과 본부 군관 전만호 김득완이며, 색리는 송지ㅁ(?)이고, 장인(匠人)은 김애립(金愛立)이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여기서 ‘4호’는 불랑기포의 크기 등급을 가리키며, ‘제147’은 이와 별개로 매겨진 생산 일련번호이다. 감주관은 화포 제작을 감독한 관리, 색리는 실무를 담당한 아전, 장인은 실제 주조를 맡은 기술자를 뜻한다. 김득완이 강화부의 군관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이 포는 1673년 당시 강화부에서 제작된 불랑기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과학적 분석으로 본 계축명 4호

국립진주박물관은 휴대용 X선 형광 분석기(portable X-ray Fluorescence Spectrometer, p-XRF)를 사용하여 비파괴 표면 성분 분석을 진행했다. 분석 결과,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 불랑기포 계축명 4호의 주성분은 구리와 주석의 2원계 청동으로 확인되었다. 구리·주석 합금은 순수한 구리에 비해 녹는점이 낮고, 우수한 내식성과 고온을 견딜 수 있는 성질을 가진다.
명문을 통해 파악한 제작 배경과 과학적 분석 결과를 종합하면, 계축명 4호는 병자호란 이후 강화도 방어 체계 강화라는 시대적 요구 속에서 만들어진 조선 후기 화포 제작 기술의 실물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불랑기포 계축명 4호 명문 세부 컷

불랑기포 계축명 4호 명문 세부 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