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가는 시간

백범 김구 150주년

백범 김구가 꿈꾼 나라

백범 김구 탄생 150주년을 맞은 오늘, 그가 꿈꾸었던 나라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백범이 그린 나라의 모습을 되짚어 보며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되새겨 보자.

백범 김구(출처: 국가기록원 e영상역사관)

백범 김구(출처: 국가기록원 e영상역사관)

대한민국임시정부 건국강령 초안(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대한민국임시정부 건국강령 초안(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자주독립, 민족통일 정부 수립의 꿈

백범 김구는 해방 전 독립운동을 하던 시기에 일관되게 자주독립 국가를 세우는 것을 자신의 목표로 삼았다. 1945년 11월 23일 귀국한 그의 앞에는 국가 건설 과정에서 수습해야 할 수많은 과제가 놓여 있었다. 궁극적으로는 일제 식민 지배가 남겨놓은 부정적 유산을 극복하고 정통성을 가진 정부, 그리고 문자 그대로 자주독립권을 가진 정부를 세워야 하는 과제가 그의 앞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우선으로 해방 직후 미군과 소련군에 의해 남북이 분할 점령되고 38선이 점점 국경처럼 되어가는 상황을 타개해, 남북을 하나로 통합한 통일국가 건설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김구는 1945년 12월 말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이 발표되자, 그 핵심적 내용인 신탁통치 실시에 반대하는 운동에 앞장섰다. 김구는 이를 ‘제2의 독립운동’이라고 표현했다. 김구와 같은 독립운동가들의 입장에서 수십 년에 걸친 독립운동은 오로지 자주독립 정부를 세우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런데 4대 강국이 최장 5년의 신탁통치를 한다고 하니, 이에 강력히 반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구는 오랜 역사를 가진 한국 민족은 독립국가를 운영할 자격과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였고, 이 점을 특히 강조했다. 신탁통치 문제를 협의하려던 미소공동위원회는 1946년과 1947년 두 차례에 걸쳐 열렸으나, 결국 어떤 합의도 보지 못하고 결렬되었다. 미국과 소련은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여시킬 정당과 사회단체의 범위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끝내 의견을 좁히지 못했다. 이는 향후 구성될 임시정부의 주도권을 좌우익 중 누가 쥐게 할 것인가를 놓고 입장 차이가 컸기 때문이다. 결국 미국은 한국 문제를 유엔에 넘겼고, 유엔은 남북한에서 총선거를 통해 정부를 구성하기로 했다.
그러나 소련 측이 유엔 위원단의 북한 입경을 막아 북한에서의 총선거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결국 미국과 소련은 각각 남북한에 분단정부를 세우는 길로 나아갔다. 이에 김구와 김규식을 비롯한 민족주의자와 중도파 세력은 미국과 소련을 제치고 남북한의 정치 지도자들이 직접 만나서 이 문제를 논의할 것을 제안했다. 이른바 ‘남북협상’ 제의였다. 1948년 4월 김구와 김규식은 평양에 가서 김일성, 김두봉 등을 만났다. 그러나 소득은 없었다. 김구 등 남북협상파는 분단정부 수립이 결국 남북 간의 동족상잔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라며 이를 막기 위해 마지막까지 노력했지만, 1947년부터 시작된 미국과 소련의 냉전을 배경으로 하는 남북한 분단정부의 수립은 막을 수 없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건국강령 초안(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대한민국임시정부 건국강령 초안(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삼균주의 신민주국가
자유민주제도 국가, 도덕국가의 꿈

김구가 이끄는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해방을 앞두고 새롭게 세울 국가의 체제 구상을 시작했다. 1941년 만들어진 임시정부의 ‘건국강령’과 ‘임시헌장’ 이 그것이다. 김구와 임시정부가 구상한 국가는 ‘삼균주의 신민주국가’였다. 즉, 삼균주의에 토대를 둔 새로운 형태의 민주국가였던 것이다. 삼균주의는 조소앙이 창안한 것으로, 정치·경제·교육에서의 균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구체적인 정책으로는 정치 영역에서의 보통선거 실시, 경제 영역에서의 토지와 대생산기관 국유화, 교육 영역에서의 의무교육 실시 등을 주장했다. 당시 임시정부뿐만 아니라 임정의 여당이던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 등은 모두 당의, 당강 등에서 이와 같은 삼균주의 이념과 정책을 강조해 왔다.
김구는 귀국 이후에도 계속해서 앞으로 새로 만들어야 할 나라는 삼균주의 이념에 토대를 둔 신민주국가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삼균주의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민주주의적인 요소를 갖고 있었다.
한편 김구와 임정 요인들은 귀국 이후 국내의 정치 상황이 좌우 대립으로 전개되자, 자유주의와 민주제도(민주주의)에 토대를 둔 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생각을 굳혀갔다. 김구는 공산주의 국가는 독재와 전제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고 보고 이에 반대했다. 그는 〈나의 소원〉이라는 글에서 자신의 정치 이념은 ‘자유’라고 밝혔고, 또 어느 개인이나 계급의 독재가 아닌 민주제도의 실시를 통해서만 크고 높은 문화의 국가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민주제도란 ‘언론의 자유’, ‘투표의 자유’, ‘다수결에 복종’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그 요체로 한다고 보고, 이러한 민주제도에 토대를 둔 국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구상한 정치체제는 한마디로 ‘자유민주제도’였다. 이는 훗날 일반적으로 ‘자유민주주의’라고 불린다.
또 그는 〈나의 소원〉을 통해 그가 궁극적으로 만들고 싶은 국가는 경제적인 부국이나 군사적인 강국보다는, ‘높은 문화의 힘’을 가지고 세계평화를 이끌 수 있는 나라라고 밝혔다. 오늘날 학자들은 이를 김구의 ‘문화국가론’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는 ‘문화국가’라는 말을 직접 쓰지 않았고, ‘높은 문화의 힘을 가진 나라’라고 표현했을 뿐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높은 문화의 힘’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인의·자비·사랑의 덕성이었다. 그는 우리 민족이 이와 같은 덕성(도덕)을 갖추고 솔선하여 실천함으로써 세계평화에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덕성은 교육과 문화에 의해서만 양성될 수 있다면서 교육과 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상에서 정리한 바와 같이 김구가 꿈꾼 나라는 ‘자주독립·통일민족 국가’, ‘삼균주의 신민주국가’, ‘자유민주제도의 국가’, 그리고 ‘높은 문화의 힘을 가진 도덕국가’였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