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하는 역사
한불 수교 140주년 특집
교과서에서 말하지 않은
프랑스혁명: 민주주의와 시민
프랑스혁명은 세계사 교과서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 주제이다.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에서 프랑스혁명은 “자유, 평등, 형제애라는 표어 아래 시민사회가 형성”되었고, “민주주의의 발달을 가져온 시민혁명”으로서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소개된다. 그런데 우리는 이 프랑스혁명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교과서에 서술된 매우 단순화된 설명으로는 프랑스혁명이라는 복잡한 역사적 사건의 본질을 보여주지 못하며, 프랑스혁명이 일으킨 구체적인 변화와 그 의미 역시 전혀 알 수 없다. 이 글은 교과서에서 말하지 않는 프랑스혁명에 대한 이야기이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1789년)

바스티유 함락
18세기 사람들이 말하는 민주주의는 우리가 현재 이야기하는 민주주의와 그 의미가 달랐다. 당시 사람들에게 민주주의는 직접 민주주의만을 뜻했다. 루소가 말했듯이 주권은 결코 양도할 수 없는 권리였기에, 주권의 행사를 타인에게 양도하는 체제인 대의제는 당연히 민주적일 수 없었다. 그러나 인구와 영토가 이미 크게 늘어난 18세기 유럽에서 직접 민주주의는 이미 불가능했기 때문에 대의제를 적용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서양어 ‘democracy’는 본래 ‘주권’ 개념을 포함하지 않으며 오직 ‘다수가 통치하는 체제’라는 의미만을 가진다. 우리가 사용하는 번역어인 ‘민주주의’와 차이가 있다. 따라서 프랑스혁명은 인민이 주권을 가지는 체제를 만든 것이 아니라 다수가 통치하는 체제를 만들려고 했지만,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대의제를 도입한 것이라고 해야 옳다.
이러한 관념 아래 군주제 국가의 수동적인 백성에서 정치적 존재인 ‘국민’이 된 프랑스인들은 자신들의 의지가 최대한 반영될 수 있는 체제를 만들어야 했다. 그중 가장 중요한 두 가지는 정치적 권리의 기반이 되는 지역구를 새로 설정하고 투표권을 부여하는 문제였다. 우선, 각 지역의 목소리를 최대한 듣기 위해서는 행정구역을 개편해야 했다. 여러 종류의 행정구역이 중첩되어 복잡하고 매우 비효율적이었던 구체제의 지방 구분을 없애고 단일한 법과 제도, 즉 공통의 대표가 만든 공통의 법의 지배를 받는 새로운 행정구역 만들기는 1789~1790년에 이어졌던 가장 중요한 과업이었다. 당시 국민의회의 의원들은 이 작업에서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 우선 각 지역의 넓이와 인구가 비슷해야 하고, 지역별 경계는 문화적 경계를 반영해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그래서 프랑스를 가로와 세로가 각각 약 72km인 정사각형으로 나누어 80개 도(département)를 만들자는 제안이 나오기도 했다. 이러한 제안과 함께 몇 가지 조건을 고려해 결국 83개 도가 1790년에 새로 태어났다. 이러한 도 체제의 창설은 행정적 효율성을 높일 수 있었다. 또한 세습적인 권력이 사라지고 각 도의 주민들이 직접 선출한 관리들로 지방 권력이 재편되면서 이제 프랑스인들은 의지를 대변할 자신들의 행정관을 가지게 되었다.

83개 도로 새롭게 구획된 프랑스
당시 프랑스인들이 마주한 질문은 이 새로운 지역 기반 위에서 ‘누가 국민의 대표가 될 수 있는가?’였다. ‘국민의회’를 스스로 구성하면서 ‘공통의 대표가 공통의 법을 만들고, 또 이 공통의 법의 지배를 받는’ 국민이 된 당시 프랑스인들에게 이 질문은 매우 중요했다. 프랑스 국민 공통의 대표를 선출할 수 있는 자격을 누가 갖추었는가? 그리고 누가 국민 공통의 대표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는가? 여기서 ‘시민’의 개념이 등장한다. 이 ‘시민’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시민’과 다르며, ‘시민혁명’·‘시민사회’ 등에 포함된 ‘시민’과도 다르다. 마르크스주의에서 말하는 ‘부르주아(bourgeois)’를 ‘시민’으로 번역하고, 또 현대인들이 사용하는 ‘시민’의 개념을 18세기 역사에도 적용하면서 혼란이 발생한 것이다. 이 ‘시민’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인물은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를 발표하여 유 명해진 시에예스(Emmanuel-Joseph Sieyès)였다. 시에예 스는 부유한 사람이어야 여가 시간에 수준 높은 사고를 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개인의 경제력(정확히는 세금 납부액)에 따라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관념은 시에예스만의 생각이 아니라 당대인들에게 널리 퍼져 있었고, 결국 시에예스의 주장에 따라 사회를 구성하는 능동적인 정치적 권리를 가진 능동시민(citoyen actif)과 자신이 가진 자연권을 누군가로부터 수동적으로 보호받아야 하는 수동시민(citoyen passif)으로 국민을 나누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능동시민 가운데 더 많은 세금을 납부하는 사람에게 피선거권을 주었다. 사실 이러한 차별은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에도 나타난다. 제1조에 따르면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 누구나 자유롭게 살아가고 권리의 평등을 누리지만, 제11조와 제14조 등에서는 공적 업무에 참여할 권리와 자유롭게 발언하고 출판할 수 있는 권리 등은 일반적인 ‘인간’이 아닌 ‘시민’에게 속하는 것이었다.
결국 경제적 능력이 정치적 권리의 수준을 결정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렇게 프랑스인들은 프랑스혁명과 함께 정치적 의미의 ‘국민’이 되었지만, 시민의 구별이라는 현실과 맞닥뜨려야 했다. 누구에게나 당연히 있어야 할 정치적 발언권이 경제력에 따른 새로운 계급질서로 인해 차별적으로 적용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프랑스혁명과 민주주의의 관계를 짚어볼 때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줄 수 있는지 더 고민 한다면, 몇 가지 역사적 사건만 시간 순서대로 보여주며 민주주의와 관련해 중요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프랑스 혁명기에 어떤 일이 일어났고 어떤 결과가 나타났다는 설명 방식은 대체 누구를 위한 서술일까? 더욱이 우리의 관념으로 당대인들이 때로는 목숨을 걸면서 지키거나 확대시켰던 정치적 개념들을 재단하고 오해한다면 그 자체로 비역사적이지 않을까? 주변부에 속한 더욱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 발언권을 얻으려는 민주주의와 정치적 투쟁의 역사를 고려한다면, 현재까지도 여전히 정치적 평등을 이루기 위한 주변부의 투쟁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혁명의 역사가 현재성을 가진다는 점을 상기시켜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