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 유물 이야기

참으로 시의 적절한
1950년대 한국 영화 소개

2019년은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로, 역사적으로 기념비적인 해인 동시에 ‘한국 영화 탄생 100주년’을 맞아 영화사적으로도 뜻깊은 해다. 이를 축하하기라도 하듯 지난 5월에는 봉준호 감독이 영화 <기생충>(2019)으로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그는 소감에서 자신이 받은 상을 “칸 국제영화제가 한국 영화 100주년에 주는 선물”이라고 말하며, <기생충>은 ‘역사 속 한국 영화들이 있었기에 탄생할 수 있었던 결과물’임을 밝혔다. 봉준호 감독이 영향을 받았다는 ‘역사 속 한국 영화들’은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를 비롯해 1960년대 작품을 의미한다. 1960년대는 소위 한국 영화 황금기로, 1950년대 중흥기가 발판이 되었다. 한국전쟁 후 미국 문물이 물밀듯이 들어온 1950년대에는 미국 영화가 한국 영화계를 잠식할 기세였다. 그러자 정부는 각종 국산 영화 장려 정책을 실시해 한국 영화계를 보호 육성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 한국 영화는 1959년 제작 편수 100편대를 기록하며 성장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1950년대 한국 영화와 극장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1950년대 극장 문화

요즘은 손가락 터치만으로도 영화를 다운로드하거나 스트리밍할 수 있는 시대다. 거실 소파에 누워 배를 긁으며 TV로 지난 영화와 최신 영화를 섭렵할 수 있고, 달리는 대중교통 안에서도 휴대전화로 실시간 영화 감상이 가능하다. 반면 1950년대 사람들은 선택의 여지없이 극장에 가야만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상영작에 대한 정보는 신문 광고나 극장에서 뿌린 전단지를 통해서 얻었다. 박물관 소장품인 ‘중앙극장 6월 명작진 리플릿’(그림1)은 1959년 6월 중앙극장에서 배포한 홍보물이다. “중극이 마련한 6월의 명작진!!”이라며 상영작들을 소개하고 있으며, 엄심호 감독의 <황혼에 깃든 양지>(1959)가 첫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그 “화제의 엄감독!!”에 대해서는 내지에서도 한 면(그림2)을 할애하여, 그가 “우리나라 허리웃”이라는 “명동 충무로”에서 입이 마르게 칭찬받고 있음을 강조했다. 하단에는 “맑은 화면에 정확한 발성”, “거리감 없이 편이 감상할 수 있는 곳!”, “거기가 여러분의 중앙극장!!”이라며 극장도 홍보하고 있다. 1934년 명동에 개관한 중앙극장은 2007년 중앙시네마로 이름을 바꾸기까지 오랜 세월 영업을 이어갔지만 2010년 결국 폐관했다. 한편 1950년대에 건립해 지금까지도 ‘한국의 헐리웃’ 충무로에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극장이 있다. 바로 대한극장이다. 대한극장은 1958년 20세기 폭스사의 설계에 따라 당시 국내 최대 규모와 최신 설비를 갖추고 문을 열었다. ‘대한극장 개관 기념 안내서’(그림3) 표지에는 “Dahan Theatre”, “대한극장” 간판을 걸고 폭죽을 맞고 있는 극장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내지에는 “완전한 공기 온습 조절 장치”로 “항상 상쾌하고 위생적인 공기를 공급 유지”하는 냉난방 환기 설비, 전기 설비 등을 설명하고 있다. 설명문과 함께 극장 외관과 내부 좌석 모습을 담은 사진이 있어 개관 당시 극장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다(그림4). 대한극장은 2001년 공사를 거쳐 현재의 멀티플렉스관으로 재개관해 지금까지 명맥을 잇고 있다.

중앙극장 6월 명작진 리플릿 표지
중앙극장 6월 명작진 리플릿 내지
대한극장 개관 기념 안내서 표지
대한극장 개관 기념 안내서 내지
1950년대 대표 영화 <자유부인>

오늘날의 멀티플렉스관은 여러 개의 스크린관 뿐만 아니라 쇼핑, 외식, 오락 등의 다양한 여가 시설도 겸하고 있다. 요즘 사람들이 편안한 방구석 1열을 뒤로하고 영화관을 찾는 이유를 알 법도 하다. 그러나 1950년대 극장은 이런 일들이 불가능했으니, 과거 사람들이 극장을 방문한다는 것은 오로지 보고 싶은 그 영화를 보기 위한 일이었던 것이다. 대체 어떤 내용의 영화가 사람들의 발길을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1950년대 사회를 강타한 화제작으로는 요즘 사람들도 제목을 들으면 누구나 알 만한 한형모 감독의 작품 <자유부인>(1956)을 꼽을 수 있다. <자유부인>은 소설가 정비석(1911~1991)이 1954년 서울신문에 연재한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다(그림5). 7만 부가 판매되며 이미 소설로 인기를 검증받은 서사는 한형모 감독의 손을 거쳐 영화로 만들어져 관객 10만여 명을 동원, 1956년 흥행 1위를 차지했다. “당신이 장태연 교수라면 과실을 범한 아내에 대해서 어떠한 결정을 지으시겠습니까?” ‘자유부인’이라는 제목과 포스터(그림6) 속 ‘장태연 교수’, ‘아내의 과실’이라는 키워드로 짐작할 수 있듯 주인공은 자유부인인 오선영과 그 배우자인 장태연 교수다. 가정주부 선영은 우연히 동창을 만나 서양식 댄스 파티에 가게 되고, 옆집 청년과 춤바람이 난다. 동시에 양품점에서 일하게 되면서 다른 남자에게도 흥미를 갖는다. 그렇지만 선영만 탓하지 말라. 춤바람만 바람인가? 장태연도 미군 부대의 타이피스트인 양공주 미스 박에게 집적댄다. 이처럼 <자유부인>은 오선영 부부의 불륜 이야기다. 하지만 선영의 외도만이 ‘과실’로 치부되고 사회적 처단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것은 그가 여자이기 때문에, 특히나 미국 문물에 심취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선영이 잘못을 뉘우치고 가정으로 복귀하는 것으로 끝나 관객들을 안심시켰다.

어떤가. 고전 영화라고 하면 낯설고 어려운 느낌이지만 사실은 요즘 유행하는 막장 스토리와 다를 바 없지 않은가. 다만 영화의 배경이 1950년대 서구 문물 유입으로 혼란스러운 전후(戰後) 한국 사회를 바탕으로 하고 있을 뿐이다. 영화 속 애정 신의 수위 문제 때문에 군데군데 잘려나가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1950년대 사회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영화는 제작과 표현 과정, 그리고 겸열과 삭제 과정에서 여러모로 당대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다. 올가을, 한국 영화 100주년을 맞아 한 세기에 걸친 한국 영화와 현대사의 관계를 생각해보는 일도 의미 있을 것이다.

소설 <자유부인> 단행본 1, 2권
글. 자료관리과 최혜연 학예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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