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그날

1899년 9월 18일,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 ‘경인선’ 운행

소달구지와 인력거가 오가고 강을 건너려면 나룻배를 타야 했던 시절, 기차는 연기와 불을 내뿜는 수레라는 뜻의 ‘화륜거’라 불렸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교통수단인 기차는 그토록 놀랍고 생경한 모습으로 우리의 역사 속으로 들어왔다.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 일이다.

1899년 9월 18일, 우리나라의 철도 시대가 열렸다. 경인선 노선 중 노량진과 제물포(인천의 옛 이름)를 잇는 약 33km 노선이 부분 개통되어 운행을 시작하면서부터다. 그 후 1900년 6월 홍수로 공사가 지연되었던 한강철교가 준공되자 같은 해 7월 남대문역(현 서울역)까지 42km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 경인선의 완성이었다. 경인선은 1965년 복선화된 데 이어 1974년에는 전철화되어 지금에 이른다.

연기와 불을 내뿜는 수레라는 뜻의 ‘화륜거’라 불린 기차는 단번에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기차의 위력을 시험하려고 철로에 바위를 가져다놓거나 배짱 좋게 철로를 베개 삼아 낮잠을 즐기는 구경꾼도 있었다. 반감의 눈초리도 적지 않았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일본을 향한 적개심이 컸고, 조상의 소중한 유물인 땅과 산을 마음대로 깎아내려 조상을 욕보였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기차에서 불똥이 튀어 철도 인근 초가를 태우는 일도 빈번했다. 게다가 상등석에 타려면 쌀 반 가마니 값을 치러야 할 만큼 비싼 요금은 기차를 더 멀리 느끼게 했다. 하지만 적극적인 홍보와 1900년 이후 요금이 내리자 기차 이용객이 늘어나면서 대량 수송 역할을 톡톡히 해내기 시작했다.

경인선은 외세에 시달린 우리나라 과거사의 씁쓸한 단면이기도 하다. 조선은 제물포항이 열리자 서울과 항구를 연결하는 철도 부설의 필요성을 느꼈지만 자금과 기술 부족으로 시도하지 못했다. 이 틈을 노린 미국 사업가 제임스 모스(James R. Morse)는 적극적 공세를 펼친 끝에 철도 부설권을 얻어냈다. 하지만 대륙 진출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청일전쟁을 준비하던 일본은 서울과 인천을 잇는 철도의 중요성을 깨닫고 집요하게 방해 공작을 펼쳤다. 결국 철도 부설권은 일본이 세운 경인철도합자회사로 넘어갔다. 경인선을 장악한 일본 정부와 자본가들은 조선에서 우세하고 강력한 지위를 확보하는 데 성공하며 조선 침탈을 가속화했다.

우리의 힘으로 철도를 부설했더라면 기차가 첫 운행을 시작한 지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미래의 100년, 세계로 뻗어가는 철도 인프라를 구축하는 일은 이 시대에 남겨진 과제는 아닐까.

경인선 한눈에 보기
* 1899년 9월 18일 기준
사진 제공. 인천광역시화도진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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