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가는 시간

근현대사 재발견

정복이 아닌 공존의 기록,
산이 빚어낸 역동의 한 세기

『한국 근대 등반, 역동의 한 세기』라는 제목 아래 진행된 이번 주제연구서는 대한민국 산악 역사 100년의 궤적을 통해 등산이 단순한 여가를 넘어 우리 사회의 역동성을 어떻게 반영해 왔는지 살폈다. 일제강점기 저항의 상징부터 현대의 대중화까지, 산을 정복이 아닌 공동체의 가치로 채워온 산악인들의 치열한 기록이다.

한국 근대 등반, 역동의 한 세기

한국 근대 등반, 역동의 한 세기

조선인의 모임이 엄격히 금지되던 1940년 11월, 백령회의 주도로 조선인 등반가 50여 명이 북한산 인수봉 정상에 비밀리에 모였다

조선인의 모임이 엄격히 금지되던 1940년 11월, 백령회의 주도로 조선인 등반가 50여 명이 북한산 인수봉 정상에 비밀리에 모였다

등산은 왜 하는 걸까? 2025년 산림청 조사에 따르면, 성인 네 명 중 세 명이 한 달에 한 번 이상 등산하거나 숲길을 걷는다고 한다. 이 정도면 등산은 진정한 ‘국민 여가’라 할 수 있다. 한국인이 산을 자주 찾는 이유는 산이 많아서도, 산과 원래 친숙해서도 아니다. 최근의 등산 열풍은 풍수지리 전통, 일제 식민 정부가 도입한 영국식 전원도시 모델, 그리고 노동력 재생산을 위한 국가 차원의 등산 장려가 맞물려 만들어낸 역사적 결과다.

한국 전문 등반의 역사와 요소
『한국 근대 등반, 역동의 한 세기』는 한국에서 등산이 유행하는 이유를 역사적으로 탐구한다. 1910년 근대적 등산이 처음 시작된 이후 100여 년 동안 등산의 흥망성쇠를 다뤘다. 특히 암벽등반, 고산등반, 설상등반 같은 ‘전문 등반’에 초점을 맞추었다. 오늘날 등산은 누구나 쉽게 즐기지만, 그 배경에는 전문 산악인들의 산악계가 존재했다. 전문 등반은 하이킹과 달리 고도의 장비, 기술 훈련, 규범 체계라는 세 가지 요소가 갖추어져야 하며, 이 세 요소는 자발적 참여와 논쟁, 합의를 통해 형성되는 공동체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

전통 유람에서 근대적 조직 등반으로
조선 후기에는 사대부들이 산수가 좋은 곳을 며칠씩 유람하는 유산(遊山)이 전국적으로 유행했다. 반면 등산은 남녀노소가 주로 주말에 다녀온다는 점에서 유산과는 다른 근대적 행위다. 전문 등반은 1920년대 말 몇몇 조선인, 일본인, 서양인들이 다양한 경로로 시작했다. 1931년 조선산악회가 창설되었고, 각급 학교 산악부도 설립되면서 암벽등반, 고산등반, 설산등반 등이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
조선산악회는 다수가 일본인이었으나 소수의 조선인도 활동했다. 이들은 조선인만의 소모임인 백령회를 결성했다. 백령회는 해방 직후 조선인만의 조선산악회(1950년 한국산악회로 개칭)를 창립했고, 회원들은 ‘강역의 파수꾼’을 자처했다. 송석하, 현동완, 석주명, 홍종인 등 사회 저명인사를 회장단으로 영입했고,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총 11차례에 걸친 국토구명조사사업도 진행했다. 등산이 단순한 야유회가 아니라 규율과 기개를 기르는 행위임을 보여주기 위해 행사와 대회를 개최했다.
박정희 정부 시기부터 등산은 국가에 의해 전유되었다. 1960년대에는 군, 대학, 대한산악연맹 3자가 협력하는 ‘특수체육회’가 운영되었고, 1970년대에는 산악인들의 표를 얻기 위해 산장 35개소를 무계획적으로 건설하기도 했다. 해외 고산등반 원정대에 대한 정부의 직접 지원도 이때 시작되었다. 원정대에는 과도한 기대가 쏟아졌고, 정상 등정을 거짓으로 보고하는 관행도 적지 않게 이어졌다.
산의 많은 부분은 여전히 국가의 통제 밖에 있었다. 산악인들은 산과 산악계를 해방구로 여기며 자율적으로 관리했다. 한국에는 높은 산은 없지만 바위가 가파르고 겨울바람이 매섭다. 북한산과 도봉산의 깎아지른 바위 봉우리, 설악산의 가파른 빙벽에서 산악인들은 서로 경쟁하며 끈끈한 공동체 결속을 유지하고 열정의 예술을 빚어냈다. 등반 대상지를 산악회들이 공동으로 관리하고 공론장을 통해 숙의하는 체제를 스스로 확립했다.

등산의 대중화와 산악 영웅의 등장
1980년대부터 등산은 본격적으로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산을 전 국민의 ‘휴양지’로 인식하는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관의 개입도 시작되었다. IMF 경제위기와 신자유주의 체제로의 전환은 등산 인구 증가를 가속화시켰고, 이는 역설적으로 산악계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기업 자본과 언론은 ‘산악 영웅’ 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내면서, 난관과 탐험을 중시하는 산악계 내적 규범보다는 정상의 해발고도와 오른 봉우리 수에만 주목하게 되었다. 위험을 감수하는 모험적 태도 자체가 부정적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오늘날 산을 오르는 인구가 어느 때보다 많지만, 산의 날카로운 면모는 노력하지 않으면 찾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모험은 그 위험을 감수하는 공동체가 존재할 때만 가능했다.

1981년 북한산 인수봉에서 열린 제1회 전국암벽등반대회. 등반을 경쟁 스포츠로 여기는 이 행사는 등반의 내적 규범 체계가 발달한 결과이자, 산악계 기존 위계질서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1981년 북한산 인수봉에서 열린 제1회 전국암벽등반대회. 등반을 경쟁 스포츠로 여기는 이 행사는 등반의 내적 규범 체계가 발달한 결과이자, 산악계 기존 위계질서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1953년 국토구명조사사업의 홍종인 단장이 독도에서 한국산악회 표석을 설치하고 있다.

1953년 국토구명조사사업의 홍종인 단장이 독도에서 한국산악회 표석을 설치하고 있다.

1981년 북한산 인수봉에서 열린 제1회 전국암벽등반대회. 등반을 경쟁 스포츠로 여기는 이 행사는 등반의 내적 규범 체계가 발달한 결과이자, 산악계 기존 위계질서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1981년 북한산 인수봉에서 열린 제1회 전국암벽등반대회. 등반을 경쟁 스포츠로 여기는 이 행사는 등반의 내적 규범 체계가 발달한 결과이자, 산악계 기존 위계질서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