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하는 역사
대중문화의 역사
우리 대중문화의 형성과 스타:
식민지의 절망 속에서 피어난 꿈
식민지의 척박한 땅에서 스타라는 낯선 빛이 떠올랐다. 은막의 환상과 레코드의 선율에 마음을 빼앗긴 민중은 스타를 통해 자존감을 회복하고 시대의 슬픔을 공유했다. 가출을 감행하던 열다섯 소녀들의 동경에서 시작해 오늘날 세계를 열광시킨 BTS에 이르기까지, 한국 대중문화가 걸어온 눈물겨운 연대와 역동의 기록을 되짚어 본다.
2026년 3월 21일 광화문에서 열린 BTS 콘서트 모습
윤심덕(<매일신보> 1927.8.6.), 이애리수(<매일신보>, 1935.5.21.)
대중문화의 태동과 스타를 향한 열망
1939년 6월, 인천의 소학교 5학년생
유윤순(15세)이 돌연 집을 나선 후 종적을 감췄다. 배우를 동경하다가 가출한 것이다. 1934년 8월,
첩첩산중 평안북도 후창군(지금의 김형직군)의 열다섯 살 소녀 이춘희도 극단 배우의 꾐에 빠져 배우가 되려고
가출했다가 경찰에 붙들려 돌아왔다. 소녀들의 가슴을 뛰게 한 것은 은막 너머 화려한 세상이었다. 이들이
감행한 여정은 식민지 조선의 척박한 대지 위에 스타라는 낯선 신성이 빛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1920~1930년대를 거치며 이 땅에도 대중문화라는 이름의 새로운 빛과 선율이 흐르기 시작했다. 한국 최초의 영화
<의리적 구토>(1919)를 시작으로 나운규의 <아리랑>(1926), 이규환의 <임자
없는 나룻배>(1932) 등이 대히트하며 영화는 조선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도시와 읍에 극장이 들어섰고
각지의 공회당에서, 벽지의 학교 운동장에서도 활동사진이 상영됐다. 곳곳이 ‘시네마 천국’이었다. 비슷한 시기,
윤심덕의 ‘사의 찬미’(1926)와 이애리수의 ‘황성의 적(황성옛터)’(1932)이 울려 퍼지며 대중가요도 확산되기
시작했다. 1927년 경성방송국의 개국과 1928년 전기 녹음 방식의 도입은 대중가요에 날개를 달아주었고, 6대
레코드사가 주도하는 음반 시장도 형성됐다.
스포트라이트 뒤에 가려진 스타의 그늘
대중문화의 중심에는 밤하늘의 유성처럼 빛나는 스타가 있었다. 대중은 스타를 동경하며 러브 레터를 보내고, 그들의
사진이 담긴 잡지를 사 모으는 ‘덕질’도 시작했다. 하지만 화려한스타를 비추는 스포트라이트의 그늘은 짙고 어두웠다.
주류사회의 시선에서 연예인은 여전히 천한 ‘광대’였다. 인기 가수 이애리수는 연희전문 학생과의 사랑이 남자 쪽
집안의 반대에 부딪히자 함께 정사를 시도했다. <아리랑>의 스타인 원조 ‘국민 여동생’ 신일선은 간난신고
끝에 기방에서 노래하며 생계를 이었다. 스타의 삶조차 위태로운 외줄타기였다. 매일 기차에 몸을 싣고 떠도는 유랑의
삶 속에서 ‘집이 있어도 없는 것 같은’ 타향살이의 설움을 노래로 달래야 했다.
대중은 스타에게 자신의 꿈과 슬픔을 투영했다. 비루한 현실 속 식민지 민중에게 스타는 ‘나도 누군가의 주인공이 될
자격이 있다’는 자존감을 심어주는 거울이었고, 그래도 벗어날 수없는 슬픈 현실의 동반자였다. 스타와 욕망과 슬픔을
공유하며 ‘팬’이라는 새로운 인간형이 탄생했다.
식민지 민중의 위로가 된 민족의 연대
식민지라는 상황 속에서 이러한 동일시는 때로 의도하지 않은 민족적 연대감을 낳기도 했다. 관객들은
<아리랑>의 주인공 영진을 보며 3·1운동 때 받은 고문 탓에 미쳤다고 상상했고, ‘목포의 눈물’의
검열된 가사 너머에서 망국의 한을 읽어내기도 했다. 스타의 목소리는 검열의 칼날을 피해 민중의 가슴속에 숨어든
불온한 위로였다. 함께 웃고 우는 집단적 체험을 통해 스타와 팬은 식민지 권력의 의도를 넘어서는 능동적 체험의 장을
만들어내곤 했다.
100여 년이 흐른 지금, 2026년 3월 21일 광화문 광장에서는 BTS의 공연이 열렸다. 열다섯 살 두 소녀가
갈구하던 스타가 식민지의 결핍을 메우기 위한 슬픈 환상이었다면, 오늘의BTS는 한국의 대중문화가 세계와 소통하고
호흡하는 판타지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100년 전 스타와 팬이 척박한 현실을견디기 위해 서로를 보듬었던 눈물겨운
연대가 2026년 광화문이라는 현대의 공간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재현되고 변주될지 지켜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