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하는 역사

특별전 속 박물관

1946년, 박물관의 개화기(開花期)

지금으로부터 80년 전, 1946년은 한국 박물관 역사에서 유독 분주하고도 특별한 한 해로 기억될 만하다. 해방의 감격이 채 가시지 않았던 1945년 12월, 서울 경복궁 안에서 오늘날의 국립중앙박물관인 국립박물관이 첫 문을 열었다. 하지만 이는 서막에 불과했다. 한국의 박물관이 본격적으로 움직인 해는 단연 1946년이었다. 미군정이라는 녹록지 않은 시대 상황에서도 다양한 박물관이 개관하고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광복의 기쁨 속에 형성된 한국 사회 내부의 열망과 성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또한 1946년은 특별 전시가 처음으로 기획된 시기이기도 했다. 당시의 특별전은 전시를 통해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해방 이후 새롭게 정립되어야 할 역사 인식과 정체성을 모색하는 자리였다. 이는 일제 식민사관과의 단절, 다시 말해 탈식민의 의지가 문화 공간에서 가시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식민의 그늘을 걷어낸 고도(古都)의 국립박물관
1946년 4월, 지역에 있는 국립박물관 분관들이 일제히 개관하였다. 신라의 고도 경주, 백제의 숨결이 남아 있는 부여와 공주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 부립(府立)으로 존재하던 개성박물관 역시 국립박물관의 분관으로 편입되었다. 비록 개성박물관은 6·25전쟁 이후 북한 지역이 되면서 우리 박물관의 체제에서 사라졌지만, 당시 주요 전시품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성품’으로 남아 여전히 그 시기를 증언하고 있다. 이처럼 ‘국립’이라는 이름은 1946년에 들어 공간적으로 확장되며 ‘문화적 광복’을 선언하고 있었다.

맨땅에서 일구어낸 새로운 박물관
국립박물관의 분관들이 기존 식민지 박물관 체계를 재편한 결과였다면, 1946년은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내려는 새로운 박물관들이 태동한 해이기도 했다.
일제가 총독의 치적을 선전하기 위해 세웠던 서울 남산 시정기념관 자리(총독 관저 터)에 국립민족박물관이 들어섰다.
한국 최초의 민속박물관으로서 식민 통치의 상징적 공간을 민족문화의 전시 공간으로 전환하였다. 나아가 식민지 시기 통제되었던 지역과 문화를 전시하여 문화적 연속성을 확인하고 공동체의 정체성을 재확인하였다. 비록 6·25전쟁 중 국립박물관에 통합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당시 수집품 일부는 오늘날까지 ‘남산품’이라는 이름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남아 있다.
같은 해 4월, 인천에서도 새로운 역사가 쓰였다. ‘해방 이후 최초의 공립박물관’이라는 명예를 얻은 인천시립박물관이 탄생했다. 하지만 전시할 유물이 없어 전시품 수집부터 시작해야 했다. 인천시립박물관 소장품 번호 1번이 일제가 무기를 생산하려고 중국에서 가져와 인천 조병창에 방치해 둔 ‘중국제동종’이라는 사실은 박물관의 출발이 얼마나 어려운 여건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는 새로운 시대를 ‘보여주려는 의지’ 가 강력히 작동했던 1946년의 한 사례다.

1946년, 박물관의 개화기(開花期)

청자상감 국화무늬병(개성 5), 국립중앙박물관

국립민족박물관 현판, 국립중앙박물관

국립민족박물관 현판, 국립중앙박물관

인천시립박물관의 중국제 동종, 인천시립박물관

청자상감 국화무늬병(개성 5), 국립중앙박물관

팔사품도(덕수 5810), 국립진주박물관

팔사품도(덕수 5810), 국립진주박물관

좌절된 꿈, 대구박물관
한편 대구에서도 박물관 설립을 위한 치열한 노력이 있었다. 대구는 국립박물관 분관을 유치하기 위해 1946년 3월 ‘박물관 설립 기성회’까지 조직하며 전력을 다했다. 미군정 역시 긍정적으로 반응했고, 연말 개관을 목표로 논의가 상당히 진척되었다. 그러나 현장 점검 결과 보관 시설의 한계가 지적되면서 계획은 좌절된다. 우여곡절 끝에 1947년 시립박물관으로 힘겹게 문을 열었지만, 이마저도 1957년경 폐관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미완에 그친 대구박물관의 도전은 박물관을 향한 열망과 현실을 보여주는 1946년의 또 다른 단면이다.

왕가의 자산(資産)에서 대중의 유산(遺産)으로
일제강점기 ‘이왕가미술관’으로 불리던 곳은 1946년 3월 1일에 3·1운동을 기념하며 ‘덕수궁미술관’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조선총독부박물관이 신속히 국립박물관으로 개편된 것과 달리, 덕수궁미술관의 출범은 순탄치 않았다. 소유권을 둘러싼 갈등이 치열했기 때문이다. 국립박물관 산하에 두려는 미군정과 구(舊) 왕실의 사유재산이라는 주장이 맞서며 미군정조차 명확한 통제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혼란이 이어졌다. 또한 덕수궁 석조전(동관)이 미소공동위원회 회담 장소로 징발되면서 전시실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결국 덕수궁미술관은 1938년 신축된 서관만을 활용해 1946년 3월 제한적으로 개관하였다. 비록 불완전한 출발이었지만, 덕수궁미술관의 개관은 구왕실의 자산으로 인식되던 미술관이 해방과 함께 공공의 문화자산으로 거듭나는 역사적인 계기였다.

영웅의 귀환: 이순신 특별전
덕수궁미술관은 개관 이듬달인 1946년 4월, 《이순신 탄신 401주년 기념 특별전》을 개최하였다. 일제강점기 동안 수장 고 깊숙이 묻어 두었던 〈팔사품도〉, 〈군기도〉, 〈포진도〉 등 이순신 관련 유물들이 비로소 대중 앞에 소개되었다. 덕수궁미술관의 이순신 특별전은 일본을 물리친 역사적 영웅을 공적 공간 속으로 다시 소환한 문화적 행위였다. 같은 시기 1946년 3월, 일제가 강제로 철거하여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숨겨두었던 ‘명량대첩비’가 본래의 자리인 해남으로 돌아가는 일도 있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해방 직후 형성된 시대적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박물관 안에서의 전시와 지역 사회에서의 기념비 복원은 서로 다른 공간에서 이루어졌지만, 훼손되었던 민족적 자존심의 회복을 도모하는 동시대적 장면이었다.

광복의 기쁨과 주체성의 선언: 호우총 특별전
같은 해 8월 15일, 광복 1주년을 맞아 국립박물관은 역사적인 첫 특별전을 개최했다. 우리 손으로 직접 발굴한 ‘호우총’의 성과를 대중에게 공개하는 자리였다. 문헌 속 한국 고대사를 직접 확인하고, 일제가 구축한 식민사관에서 벗어나고자 한 시도였다. 이는 해방 이후 역사 연구의 주체성과 학문적 독립을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감격조차 시대의 불안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미군정이 경복궁 내에 막사 건설을 강행하면서 박물관 일대는 갑자기 통제되었다. 결국 전시는 당초 계획보다 이른 시점에 조기 종료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1946년 여름, 국립박물관의 첫 특별전은 해방의 감격이 문화적 에너지로 분출되는 한 장면이었다.

1946년은 한국 박물관 역사에서 다양한 시도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피어난 특별한 해였다. 이 모든 움직임은 식민 시대와의 단절, 해방의 기쁨을 박물관이라는 공간에 담아내려는 사회적 노력이었다. 비록 제도는 설익고 현실은 척박했으나, 본래의 우리를 되찾고자 한 시대적 열망이 뜨거웠던 1946년은한국 박물관사에서 가장 밀도 높은 ‘개화기(開花期)’로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