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찬란했던 ‘석탄시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문경, 보령, 태백의 석탄박물관과 함께 <석탄시대> 공동기획전을 개최한다.
국내 최대규모의 탄광 장성광업소와 도계광업소가 올해와 내년 차례로 문을 닫는다.
산업 성장의동력이자 서민의 연료였던 석탄시대가 저물고 있다.
열정 넘치고 뜨거웠던 대한민국의 ‘석탄시대’를 오롯이 담아낸 전시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길지 전시운영과 이도원 학예연구사와 이야기를 나눠본다.
전시운영과 이도원 학예연구사
대한민국 석탄 산업의 시작점이 궁금합니다.
이도원 ‘삼탄가’라는 노래가 있어요. 광복으로 탄광의 주권을 되찾은 시대상을 잘 보여주는 노래죠. 정확한 제작 시기는 불확실하나 『삼척탄광 현지 보고서』의 내용으로 미루어 1946년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노랫말을 보면 탄광에 대한 주인의식이 담긴 ‘우리의 탄광’, 석탄 증산으로 얻을 미래를 꿈꾸는 ‘새나라 동력’ 같은 단어가 눈에 띄어요. 이를 보면 당시 시대에서 석탄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그리고 탄광노동자들이 그 일에 얼마나 큰자부심을 느꼈는지 알 수 있어요.
과거에는 산업시설에서도 석탄을 에너지원으로 사용했지요?
이도원 네, 맞습니다. 석탄산업은 국가 기간산업으로 산업경제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음은 물론이고, 자원 수입을 대체하면서 외화 유출을 막는 데 큰 역할을 했거든요. 석탄 생산량을 늘려 나라에 보답한다는 의미를 가진 ‘증산보국(增産報國)’은 당시 시대상을 대표하는 구호였습니다.
우리 현대사를 ‘석탄’이라는 매개체로 들여다보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대표적인 전시 자료를 소개해주시겠어요?
이도원 이번 전시에서는 세 곳(문경, 보령, 태백)의 석탄박물관 대표 자료들을 함께 감상할 수 있습니다. 전시장 입구에서부터 모든 사람의 시선을 이끄는 거대한 석탄 덩어리(괴탄)를 볼 수 있어요. 또한 남한지역에서 최초로 석탄이 발견된 곳으로 알려진 태백지역의 석탄은 고생대 석탄기에 생성됐습니다. 지하 깊숙이 매장된 석탄을 캐는 채탄작업에 앞서서 갱도를 뚫는 작업을 굴진이라고 하는데 이 굴진 작업을 대표하는 유물이 바로 ‘착암기’입니다. 보령석탄박물관 소장의 착암기가 성인 남성의 키만큼 큰 원형 그대로 전시돼 생생함을 보여 줄 예정입니다. 그 밖에도 석탄 및 탄광 관련 다양한 작업 도구를 관람할 수 있어요.
그 외에 의미있게 보아야 할 전시자료는 어떤 것일까요?
이도원 당시 갱도 입구에는 “아빠! 오늘도 무사히”라는 표어가 걸려 있고는 했어요. 그만큼 작업 현장은 위험했습니다. 광부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특히 머리와 척추의 보호가 가장 우선시되지요. 탄광에서는 항상 부석이나 괴탄이 떨어지는 위험한 상황이 있거든요. 그런 충격으로부터 광부들을 보호하고 부상의 위험을 줄여주는 허리지지대는 필수 안전 보호 장구인데요, 이번 전시에서는 문경 탄광에서 사용한 척추보호대를 만날 수 있습니다. 또한 ‘광부 화가’라 불린 황재형 작가의 그림 <선탄부Ⅱ>(1985)를 관람할 수 있어요.
선탄부는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죠?
이도원 선탄부는 캐낸 석탄의 불순물을 골라내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탄광을 남성 노동자의 영역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선탄 작업은 여성 노동자의 영역이었습니다.
여성 일자리가 거의 없던 탄광지역에서 선탄부는 보수가 센 만큼 경쟁률이 높았다고 하죠. 가족이 탄광작업 중 사고로 다쳤거나 사망한 경우 우선적으로 생계를 위해 취업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이도원 학예연구사님이 이번 전시를 통해 관람객들에게 주시고 싶은 메시지는 어떤 것일까요?
이도원 서민의 연료이며 성장의 동력인 석탄의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1988년 2,430만톤을 생산하던 347개의 탄광은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으로 대부분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2025년 대한석탄공사 산하의 마지막 광업소의 폐광으로 이제 대한민국에는 민영탄광단 한 곳만 남게 됩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석탄산업유산을 어떻게 보존하고 기억해 나갈지 고민하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석탄시대>와 함께 보는 해외 석탄산업
석탄산업은 전 세계의 산업화를 촉진 시킨 핵심산업이었다.
20세기 후반, 석탄의 대체재 등장으로 석탄산업은 쇠퇴하였지만 석탄산업유산은
우리에게 역사적 가치가 있는 유산으로 남아있다.
글 | 이주연 건축평론가, <와이드 AR> 부발행인
인류 문명의 발전과 진화는 산업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해왔다. 그 흐름에서 19세기에 펼쳐진 산업혁명이 사회 여러 분야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다. 산업혁명의 근간은 복합적인 요인이 있겠으나 산업화의 동력을 촉진 시킨 ‘석탄의 힘’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산업화의 주역을 이뤘던 석탄을 생산하는 탄광이나 광산은 아직도 지구촌 도처에 걸쳐 남아 있다. 이 탄광들은 단순히 지난 시간의 흔적만이 아니라 지구촌의 변화에 영향을 미친 산업화의 중요한 유산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19세기 산업혁명의 중심지였던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탄광은 벨기에 왈롱(Walloon) 지역에 산재해 있다. 많은 탄광 가운데 17세기에 세운 부아 뒤 뤼크(Bois-du-Luc)를 포함한 네곳의 탄광은 19세기 초부터 20세기 후반까지 운영되던 석탄광산으로 벨기에에서 가장 잘 보존된 탄광 유적이다. 이 네 광산 유적은 길이가 170km에 폭이 3~15km에 달하며 벨기에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거대한 영역을 이루고 있다. 부아 뒤 뤼크 탄광에는 아직도 수직 갱의 운반 장비인 권양기가 설치된 탑과 승강기 철장, 광석추출기 등 건축적 기술적 요소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산업혁명의 중심지 영국의 웨일즈 서부 블래나본(Blaenavon)에는 광산과 더불어 주변 경관까지도 유산으로 지정된 탄광지역이 있다. 19세기 산업의 사회경제적 구조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고, 석탄을 캐는 수평 갱도 채굴을 개발하여 표층 채굴을 대체하는 방식이 도입되었다. 또한 세련된 배수 시설과 수송·환기 시설을 갖춘 수갱 광산(shaft mines)을 도입하는 등 획기적인 시설을 갖춘 탄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후 마을 경관에 투자하면서 수직 갱도의 빅 피트(Big Pit)를 그대로 보존하면서 탄광박물관으로 조성해 관람객들이 지하 갱도 관람도 가능하도록 활용하고 있다.
또 프랑스 노르-파 드 칼레(Nord-Pas de Calais)광산은 120,000㏊의 규모로 1700년대부터 300여 년 동안 석탄 채굴로 형성된 주목할 만한 시간과 공간의 의미를 담고 있다. 1850년부터 사용한 갱, 리프트 시설을 갖추고 면적 90㏊ 높이 140m에 이르는 광재 더미 등이 자리하고 있다. 또, 석탄 수송시설, 철도역 등의 광산 기반시설과 학교, 종교, 의료시설, 노동자들의 마을 등은 다양한 사례를 간직하고 있는 산업 유적이다.
유럽의 석탄산업이 아시아의 산업화에 미친 영향은 인도네시아 사왈룬토의 옴빌린 탄광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옴빌린 탄광 유적은 유럽인 엔지니어들이 전략상의 목적으로 식민지에서 석탄 자원을 얻기 위해 구축한 혁신적인 기술의 집약체다. 10년 전 정부 부처와 유관 자자체의 관계자들이 참여하는 ‘사왈룬토 옴빌린 탄광 유산 이사회’가 구성되어 2025년까지 산업유산 보존과 관광활성화를 위한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독일 루르지방 에센의 촐페라인 탄광이 석탄 채취를 처음 시작한 것은 1884년. 이 탄광에서는 단순한 채굴 생산에만 그치지 않고, 이 지역 석탄의 재질이 제철이나 금속가공 등에 주로 쓰이는 코크스를 만들기에 적합하여 석탄을 가공하는 코크스공장도 지어졌다. 1932년에는 근대적인 설계를 통해 구축된 ‘수직갱도’가 건설됐다.
촐페라인은 유럽에서 현대적이며 기능적 능률을 갖추면서 생산성면에서 유럽의 대표적인 탄광으로 성장했다. 특히 독일 근대건축의 토대를 다진 교육기관인 바우하우스(BAUHAUS)의 후예들이 참여해 건축기술을 향상시켜 최초 철골조 갱도를 구축하고 광부들의 안전에도 진일보한 작업 환경을 조성한 점도 주목을 받는다.
역사적 산업유산의 가치를 기리는 데에는 여러 형식의 문화 예술적 개념이 동원될 수 있다. 그러나 옛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전시하는 것만이 유산이나 유적을 사랑하고 그 가치를 기리는 것은 아니다. 이미 그 영향을 잃어가고 있는 석탄산업 문화유산도 마찬가지다. 인류 문명의 유산은 옛것으로 포장해 보존하고 감상하는 대상으로 머물러 있지 않고 이어지는 시간과 함께하는 현재진행형의 동시대적 인류자산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