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을 위해 횃불을 가져온 것처럼, 석탄은 문명을 위한 최상의 선물이었다.
화석 연료 중 석유가 귀족 행세를 했다면, 석탄은 서민의 따뜻한 이웃으로 오래 자리했다.
인류의 석탄 사용기록은 기원전 문헌에도 등장하지만, 본격적 위상을 드러낸 것은 산업혁명 무렵이다.
산업혁명은 기계시설뿐만 아니라 철도와 증기기관차도 한몫했는데, 이 모든 것을 움직인 핵심 에너지가 석탄이다.
이번 칼럼에서는 우리 경제발전의 일등 공신이었던 석탄의 희로애락을 살펴본다.
글 | 정연수 탄전문화연구소장
문경광업소와 화순광업소 등 남한지역 탄광은 일제강점기 무렵 개발됐고, 한국인·일본인·중국인 등 3개 민족의 광부가 함께 부대끼며 생산에 나섰다. 또한 수십만 명의 광부가 일본 탄광으로 징용되는가 하면, 해방 후에는 자발적으로 파독 광부로 나서는 등 한국의 탄광 디아스포라는 세계 광업사에서도 유래가 없는 독특한 현상을 드러낸다. 광부에게 붙은 ‘산업 전사’라는 영예는 일본제국주의가 아시아-태평양전쟁기에 노동력 확보를 위해 만든 국민징용령의 또 다른 호칭이다. 전투와 생산을 연계하듯 애국을 빌미로 산업 전사의 석탄 생산을 강요했다. 그만큼 석탄은 국가산업 발전에 필수적인 에너지 자원이었다. 6·25전쟁 와중에도 대한석탄공사를 창립해야 했고, 전쟁 기간 내내 광부들이 석탄을 캐야 할 정도로 석탄 확보는 국가적 과제였다. 1950년대 중반 모범 산업 전사를 선정해 대통령 관저로 초청한 일이라든가, 서울에서 3일간 위문 행사를 열 정도로 예우한 것은 석탄 증산을 위한 사기진작책이었다.
1960년대 후반 유류가격이 하락하자 주유종탄(主油從炭, 석유를 주 연료, 석탄을 보조연료로함) 정책으로 많은 탄광이 문을 닫기도 했지만, 금세 다시 석탄 시대로 돌아왔다. 1973년 중동전쟁으로 인한 제1차 석유파동, 1977년의 이상한파로 인한 연탄 소비 급증과 이듬해 이란의 유혈 혁명으로 인한 제2차 석유파동 때문이다.
탄광에서는 막장 교대, 고속 굴진1), 생산 책임량 할당 등의 정책을 통해 광부들을 몰아세웠다. 광업소마다 광부 스카우트 경쟁이 벌어졌고, 연탄공장에서는 밤을 새워 연탄을 수송했다. 석탄은 세계적인 유류파동 여파 속에서 한국의 경제를 구원한 구국의 에너지원이었다.
일제강점기에 태백의 장성광업소와 삼척의 도계광업소에서 생산한 석탄 전량은 묵호항을 통해 일본으로 수탈됐다. 1948년 5월 북한이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문제 삼아 송전을 중단했을 때, 영월화력발전소 가동을 위한 석탄이 부족했다. 태백과 삼척에 큰 광업소가 있었지만, 수송로가 없었다.
일본으로 석탄을 운반할 수 있도록 태백-묵호항 구간까지만 철로를 개설했던 탓이다. 결국 태백과 삼척의 석탄은 기차로 묵호항까지, 묵호항에서 선박을 이용해 남해를 경유해 인천항까지, 인천에서는 철도로 영월까지 3일씩 우회해서야 영월화력발전소를 가동할 수 있었다. 이 일화는 태백과 삼척의 탄광이 일제의 석탄자원 수탈을 위해 개발됐다는 증거이자, 석탄 수송을 위한 산업철도 개설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육군 공병대까지 투입한 영암선(영주-철암)이 1955년, 제천-영월-함백 구간이 1957년, 제천-태백 구간이 1973년 개통하도록 서두른 것도 석탄을 위해서였다. 철도 개통과 시승식에 대통령이 직접 참석할 정도로 석탄 수송을 위한 철도망 확충은 국가의 중대사였다. 경북의 문경선 역시 석탄 수송을 위한 산업철도로 부설 됐으니, 석탄은 한국의 철도 발전과 국토 균형 발전의 은인인 셈이다.
연탄은 김장과 더불어 월동준비 제1호 품목이었다. 1986년 이전까지 우리나라 연탄 난방 가구는 80%를 넘었다. 몇십 년 동안 물가가 가장 오르지 않는 품목도 연탄이었으니, 서민들을 위한 배려였다. 값싼 연탄이 보급되면서 땔감용 나무 벌목이 중지됐으며, 나무 동발(지주목)을 활용하던 탄광에서 산림 가꾸기에 적극 나서면서 오늘날의 울창한 산림을 보유할 수 있었다. 최근 들어 인기를 누리는 산림휴양과 숲속 힐링 프로그램 등은 연탄이 있기에 가능했다.
1960∼80년대에는 겨울철마다 연탄 품귀 현상을 빚었다. 1966년 방송사의 1등 공모 상품으로 연탄이 등장하는가 하면, 1969년에는 대통령이 나서서 장관직을 걸고 연탄공급계획을 실천하라는 지시가 내려질 정도였다.
연탄이 부족하던 1970년대 중반엔 국가에서 연탄 구매카드제를 시행하면서 배급제로 통제 할 정도였다.
구멍탄, 구공탄, 십구공탄 등 연탄을 일컫는 별칭도 다양하다. 구멍탄은 연탄이 잘 타도록 뚫어 놓은 공기 구멍 때문에 붙은 이름이고, 구공탄은 가장 처음 만든 연탄의 구멍이 아홉 개여서 붙은 이름이다. 구멍이 많을수록 연탄 크기도 커지는데 49공탄까지 등장했다. 가장 대중적인 연탄은 19공탄과 22공탄이다.
2025년 도계광업소 폐광을 끝으로 대한석탄공사는 모두 문을 닫지만, ‘산업전사추모 및 성역화추진위원회’가 나서서 광부의 날 제정을 촉구하는 특별법 제정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북한·미국·러시아·카자흐스탄·우크라이나·폴란드 등 많은 나라에선 이미 광부의 날이 제정돼 있다. 우리나라에도 광부의 날이 제정되면 석탄산업 전사들이 큰 위안을 얻을 것이다. 삼척과 태백지역에서는 탄광촌 전체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농어촌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산업공동체를 이루던 탄광촌의 문화적 정체성이라든가, 석탄공사의 핵심 사업소이던 장성광업소와 도계광업소의 현장이 사라지지 않는 방안을 강구 중이다. 폐광시설을 예술공간으로 탈바꿈시킨 정선의 삼탄아트마인2)처럼, 석탄산업 유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는 작업은 석탄 유산의 재자원화 과정이 될 것이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극복하면서 경제 대국으로 발전시킨 원동력을 제공한 한국의 석탄 산업이 유네스코에 등재될 자격은 차고도 넘친다. 시대는 폐광의 끝에 서 있으나, 산업 전사들이 막장에서 캐낸 ‘석탄-연탄’의 그 소중한 가치는 유네스코 등재를 통해 영구히 계승될 것 이란 믿음을 갖는다.
아리랑 아리랑 막장에 아라리요
노보리 고개 갭뿌(Camp Lamp) 없이 잘도 넘네
탄광촌 고개는 자물통 고개
꼭 간다 삼 년 오 년, 삼십 년이 지나고
탄굴 파서 벌어봐야 햇빛 보면 맥 못 추고
첫날부터 외상술에 퇴직금은 빚잔치
탄광촌 고개는 생지옥 고개
동발 허리 메고 나면 척추부터 내려앉네
갑 을 병방 오 년이면 이 몸부터 비쩍 말라
궁합은 묻지 마라 동발만 바짝 섰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고개로 날 넘겨주게
아리랑 아리랑 막장에 아라리요
노보리 고개 석탄 활활 잘도 넘네
탄광촌 고개는 출구 없는 미로고개
이젠 간다 봇짐 싸도 갈 길이 멀구나
빚 없으면 돈 번 게지 몸 성하면 돈 번 게지
자식보고 여기 왔지, 나 살자고 왔나
아들놈은 광부 마라 딸년도 광부 마라
사택 방은 닭장이나 꿈만큼은 대궐
열아홉 구멍마다 님도 보고 뽕도 따고
내가 캔 괴탄 석탄 이 나라 일으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고개로 날 넘겨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