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오늘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않은 한글

“노인 한 명이 죽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는 것과 같다.”
인류학자 아마두 함파테 바(Amadon Hampate Ba)가 호주 퀸즐랜드 주 벤팅크 섬의
원주민 언어인 카야르딜드어를 쓰는 마지막 인류였던 한 노인을 두고 했던 말이다.
언어가 사라지면 문화도 기억도 지혜도 모두 사라진다.
한글학회가 지킨 것은 비단 한글만이 아니다.
한글을 정립시키고 『큰사전』을 편찬하며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 기억을 지켰다.

  • 장지영, 이윤재, 최현배, 이희승, 김법린, 한징 등 한글학자가 중심이 돼 활동했던 조선어학회 Ⓒ 한글학회

1926년 11월 4일 가갸날을 선포하다

1443년 12월 창제돼 1446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란 이름으로 반포된 한글은 조선시대 때는 ‘상스러운 글’이라는 뜻의 언문(諺文)으로 불리며 천대받았다. 그러다 조선 후기 들어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한글 연구가 시작됐고, 1894년 11월 고종이 언문을 국문으로 삼는 「국문 칙령(勅令)」을 선포하며 한글의 지위는 점차 달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등장했다. 1910년 한일합병 이후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며 일제가 차츰 국문 사용을 금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주시경과 김정진 등 국어학자와 지식인들은 1908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학술단체 ‘국어연구학회’를 설립했다. 이 단체는 1911년 ‘배달말글음’으로, 1913년에는 ‘한글모’로 이름을 바꾸었다. 한글 관련 학회는 1921년 ‘조선어연구회’라 이름을 고치며 재건했고 10년 뒤인 1931년에 이름을 ‘조선어학회’로 고쳤다. 그리고 광복 이후 1949년에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며 오늘에 이른다.
1926년 조선어연구회는 민족정신을 되살리고 북돋우기 위해 11월 4일을 ‘가갸날’이라 정하고 기념식을 거행했다. 한글이 반포된 지 480년이 되던 해였다. 11월 4일(음력 9월 29일)을 가갸날로 정한 것은 『세종실록』 28년(1446년) 9월조에 언급된 “이 달에 훈민정음이 이루어지다”라는 기록에서 근거한 것으로 명칭이 가갸날이었던 것은 ‘가갸거겨’ 하는 식으로 한글을 배우는 데서 비롯됐다. 이날 행사에서 조선어연구회는 우리 문자의 명칭을 크고 무한하다는 뜻의 ‘한’을 취택해 ‘한글’로 정하자고 제안했다. 1928년 가갸날이 한글날로 바뀌면서 ‘한글’이라는 명칭은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조선어학회사건에 이어 사전을 펴내기까지

1929년 10월 31일 열린 한글날 기념식에서는 조선어연구회를 중심으로 김두봉, 방정환, 백낙준, 변영로, 염상섭, 윤치호 등 사회 각계 인사 108인이 참여한 조선어사전편찬회가 조직됐다. 당대를 대표하는 유명인사가 대거 참여한 데서 알 수 있듯 사전 편찬은 우리의 민족정신을 지키는 대사업이었다. 그들은 문화의 기초가 되는 언어를 정리하고 통일하는 것이 독립의 지름길이라 선언하며 그 최선의 방법을 사전 편찬으로 여겼다. 하지만 이들의 취지는 훗날 조선어학회사건이 유죄 판결을 받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1942년 한 여고생이 기차 안에서 친구들과 한국말로 대화하다가 경찰관에게 발각된 것이 시작이다. 취조를 통해 일본 경찰은 여학생들이 사전 편찬에 참여하던 조선어학회의 정태진에게 영향받았음을 알아냈고, 이번에는 정태진을 취조해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 단체이고 독립운동이 목적이라는 자백을 받아냈다. 조선어사전편찬회의 취지 선언문에 언급된 ‘독립’은 그 증거였다. 『큰사전』 원고에 적힌 ‘태극기, 단군, 백두산’ 같은 낱말 역시 독립운동과 불온의 증거가 됐다. 꼬투리를 잡아낸 일제는 관련된 인물들을 검거하며 치안유지법의 내란죄로 몰았다.
이 사건 당시 수난을 겪은 것은 조선어학회 사람들만이 아니다. 그들이 작업 중이던 『큰사전』 원고 역시 마찬가지였다. 관련자들이 체포될 당시 원고도 기차에 실려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하지만 일제가 태평양전쟁 패전 위기로 인해 혼란을 겪으면서 사법 행정은 원활히 이루어지지 못했고, 이 덕분에 원고 뭉치들은 사라지지 않는 대신 서울역 조선운송주식회사 창고에 방치됐다. 1945년 10월 2일 운수창고를 정리하던 서울역 역장이 이 원고 뭉치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큰사전』 출간은 기약 없이 미뤄졌을 수도 있다.

끝끝내 한글을 지켜낸 사람들

조선어학회는 일제의 간섭과 훼방에도 굴하지 않고 꾸준히 한글 연구와 사전 편찬을 병행했다. 1933년 10월에는 한글의 올바른 사용을 위해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내놨고, 1936년 10월에는 한글날에 맞춰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공표하고 1941년 1월에는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내놓았다.
조선어사전편찬회는 1936년 조선어학회에 통합됐고 전임 집필위원과 편찬원 등이 중심이 돼 사전 편찬에 박차를 가했다. 광복 이후 1947년 10월 9일 1권이 나온 이래 1957년 10월 9일 총 6권으로 완간됐다. 1권과 2권이 조선어학회의 이름을 따 『조선말 큰사전』이라 이름 붙인 반면, 조선어학회가 한글학회로 개칭된 이후 발간된 3권부터는 책 이름이 『큰사전』으로 바뀌었다. 『큰사전』은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일반어는 물론 전문어, 고유명사, 옛말 등까지 포괄한 종합 사전으로 비표준어와 버려야 할 말을 구분해 표기한 규범적 사전이기도 하다. 또한 주석뿐 아니라 용례 및 관계어들을 통해 문맥과 어휘구조를 명기한 최초의 구조적 사전이다.
최초 11월 4일이었던 한글날은 1945년 광복 이후 『훈민정음』에 언급된 한글 반포일(정통 11년 9월 상한)의 ‘9월 상한’을 9월 상순의 끝날인 음력 9월 10일로 잡고, 그것을 양력으로 환산하면서 지금의 10월 9일로 자리 잡았다. 한글을 수호하고자 힘쓴 사람들의 노고가 있었기에 우리는 이제 한글로 생각하고 한글로 말하며 마음을 나눈다. 지금 우리에게는 너무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않은 한글의 가치를 다시 생각해볼 때이다.

이달의 근현대사

월별 주요 일정
날짜 내용
11

2

88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출범 1981

3

광주학생항일운동 발생 1929

4

조선어연구회를 중심으로 한 가갸날 기념식 거행 1926

9

무력독립운동단체 의열단 결성 1919

10

조선총독부, 창씨개명제 공포 1939

17

을사늑약 강제 체결 1905

18

금강산 관광 개시 1998

27

우리나라의 독립 문제가 의논된 최초의 국제 회담 ‘카이로 선언’ 발표1943

12

1

한국방송공사, 첫 컬러 방송 시작 1980

3

IMF 구제금융 신청 1997

10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일선전성명서 발표 1941

12

유엔 총회, 대한민국 정부를 유엔 감시하에 선거 가능한 유일 합법 정부로 승인 1948

13

한반도 평화통일의 기틀,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1991

16

독일 정부와 광부 파견 협정 체결 1963

19

독립운동가 윤봉길, 오사카형무소에서 순국 1932

22

수출 목표 100억 달러 달성 19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