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이야기

우리가 살았던 독일

6·25 전쟁 직후 대한민국은 폐허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를 그대로 두지 않았다.
모두의 노력이 하나하나 모인 덕분에 놀라운 경제 성장을 이루어냈다. 1960년대부터 독일로
건너가 외화를 벌었던 광부와 간호사 역시 주역이다. 그들은 당시 독일의 ‘라인강의 기적’을
대한민국의 ‘한강의 기적’으로 만드는 데 크게 공헌했다. 글 권이종 한국교원대학교 명예교수, 파독근로자기념관 관장

  • 독일 탄광 지하 막장에서 휴식을 취하는 광부들 Ⓒ 연합뉴스

1963년 12월 협정서 체결에서 시작된
파독의 역사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직후 새롭게 탄생하거나 식민지에서 독립한 나라는 85개국가량으로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치른 대한민국은 그중 최빈국에 속했다. 1960년에 들어 대한민국의 실업률은 40%에 육박했으며 1인당 국민소득은 79달러가량으로 필리핀(170달러), 태국(260달러)에도 크게 못 미쳤다. 한국은행 외환보유고 잔액이 2,000만 달러도 되지 않았을 시절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돈을 빌리기 위해 이곳저곳에 문의했고 그 결과 독일(당시 서독) 측에서 손을 잡았다. 독일은 대한민국과 1961년 12월 차관 교섭을 타결했고 1962년부터 1억 5,000만 마르크(당시 3,000만 달러)의 상업차관을 보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상업차관이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독일과 대한민국은 또 하나의 의미 있는 협약을 맺는다.
당시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이라는 상처를 딛고 ‘라인 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놀라운 경제 성장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노동력 부족이 문제였다. 경제 활성화의 영향으로 다양한 취업 기회가 열려 있다 보니 독일 사람들은 힘든 육체노동이 요구되는 일자리는 외면했다. 땅 밑 1,000미터를 내려가야 하는 광부, 간병을 비롯해 만만치 않은 육체노동이 필요한 간호 인력 모두 기피 일자리에 속했다. 이렇듯 노동력이 필요했던 독일, 실업문제 해소와 외화 획득이 필요했던 대한민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며 우리 역사상 최초로 국가 간의 협약에 의한 인력 파견이 이루어졌다. 1962년 3월 15일 ‘한·독 경제협력의정서’, 1963년 2월 14일 ‘한·독 경제고문단 설치에 관한 협정’ 등이 체결되며 독일과의 경제협력 관계가 강화됐다. 그리고 마침내 1963년 12월 16일 ‘한국 정부의 임시고용계획에 관한 한국노동청과 독일탄광협회 간의 협정’을 통해 광부 파견 협정이 이루어졌다.
간호사·간호조무사의 경우 1950년대부터 민간 차원에서 독일로 건너가 활동한 바 있으며, 1966년 1월부터 진행된 한국해외개발공사를 통한 알선과 1969년 8월 체결된 ‘한국해외개발공사와 독일병원협회 간 협정’을 통해 국가적 차원에서 독일로 파견하기 시작했다.
광부로 선발된 인원은 1963년 12월 21일부터 1977년 12월 31일까지 8,000여 명으로, 독일에 진출해 임금을 목적으로 근로를 제공했으며 통상적으로 3년 계약을 맺었다. 간호사·간호조무사는 1976년 12월 31일까지 약 1만 2,000여 명의 간호사(간호조무사 포함)들이 활약했다.
당시 정부가 공식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근로자 파견의 가장 실질적인 목적은 ‘외화 수입’이었다. 파독 광부·간호사가 보낸 송금액은 1965년부터 1975년까지 총 1억 153만 달러가량이었는데, 특히 1965~1967년 송금액의 경우에는 국내 총 수출액 대비 각각 1.6%, 1.9%, 1.8%에 달하는 상당한 금액이었다. 광부와 간호사가 보내온 돈이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다.

  • 당시 광부들이 착용했던 상·하의 작업복 (소장품 번호: 한박6232)
  • 광부들이 착용하던 안전장화(소장품 번호: 한박6224)
  • 독성 일산화탄소나 지하 광산 화재 및 폭발로 방출된 가스가 있는 곳을 돌파, 탈출할 때 착용하던 자기구명기와 케이스(소장품 번호: 한박6227)
  • 독일 광산에서 3년 기본 계약이 끝나는 시기에 받는 광부수첩.
    숙련광부의 자격증 역할을 하기도 했다.
  • 광부들의 엉덩이 보호대

쉽지 않은 타지 생활, 험난했던 작업 환경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의 작업 환경은 영화 <국제시장>(2014)을 본 사람은 짐작할 수 있다.(이 영화의 이야기는 필자의 책 『막장 광부, 교수가 되다』를 참조해 만들어졌다.) 광부의 경우 본래 ‘3개월 이상의 탄광 경험’이 자격 조건이었으나, 실제로는 대부분 초보자들이었다. 선발 인원은 대개 강원도 탄광에서 진행된 현장 실습을 마치고 독일로 건너갔고, 독일에서 3개월간 지상 교육과 4주간 독일어 수업을 마친 뒤 탄광에 투입됐다.
광부들은 탄광에 들어가기 전 무릎 보호대, 장갑, 엉덩이 보호대, 헤드 랜턴 등의 장비를 착용했다. 한 번 내려가면 중간에 나올 수 없으므로 마실 물과 음식 등도 함께 챙겼다. 코담배(콧구멍에 삽입할 수 있도록 가루로 만들어진 담배)도 꼭 챙겨야 하는 필수 물품 중 하나였다. 막장에서 일을 하면 석탄가루와 돌가루 등이 몸속 모든 곳으로 들어온다. 그럴 때 코담배를 들이마시면 담배 가루가 코 안을 자극하면서 밖으로 석탄가루를 배출시켰다. 독일 탄광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1,000미터 이상을 내려간 다음 다시 전철을 타고 3~4킬로미터를 더 이동해야 막장이 보였다. 독일 탄광은 100미터 내려갈 때마다 온도가 1도씩 올라갔고 지열은 섭씨 36도에 육박했다. 가만있어도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작업복을 입을 수 없어 속옷만 입고서 일하기도 했고, 장화에 땀이 차면 뒤집어 붓고 다시 신었다. 사람이 직접 석탄을 캐던 당시 우리나라와는 달리, 기계화돼 있던 독일 탄광에서 일하며 가장 힘들었던 것은 ‘슈템펠’이라는 무거운 쇠기둥을 세우는 작업이다. 채탄기계가 100~150미터의 석탄층 앞을 좌우로 파고들면, 광부들은 지나간 뒷자리에 슈템펠을 세워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천장이 무너져 매몰될 수 있었다. 생존을 위해 할 수밖에 없는 작업이었는데, 40~60킬로그램에 달하는 슈템펠을 개인당 하루에 60~80개는 세워야 했다. 기계의 속도에 맞춰가며 일하다 보면 우리의 처지를 한탄할 시간은 자연스레 뒤로 미뤄졌다.
병원의 작업 환경은 파독 간호사로 근무했던 아내를 통해 생생하게 들었다. 한국 간호사들은 대개 독일 간호사를 도와 허드렛일을 맡았는데 일부는 시체를 알코올로 닦거나 수의 입히는 일을 맡기도 했다. 가장 힘들다고 하는 호스피스 병동에는 한국 간호사들이 24시간 배정됐다. 그럼에도 그들은 맡은 바 최선을 다했다. 사망한 독일인을 붙들고 보호자와 함께 울 정도로 헌신했다. 이런 일들이 현지 신문에 보도되면서 차츰 한국 간호사들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독일 사람들은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우리 간호사들을 일컬어 “한국 천사(Engel)들”이라 불렀다.

  • 권이종 교수가 근무했던 독일 광산의 외관 Ⓒ 권이종
  • 당시 독일 광산의 지하 탄광 내부 Ⓒ 권이종
  • 파독 광부들은 지하 광산에서 틈틈이 독일어를 공부하고는 했다. Ⓒ 권이종

처우 개선을 위한 노력

파독 광부 및 간호사들의 노력은 외화 수입에 큰 도움이 됐음은 물론 대한민국이 압축 경제 성장을 이루는 데도 적잖은 기반을 닦았다. 외신에서 극찬했던 ‘한강의 기적’에 일조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독일에 사는 교포는 대부분 1960년~1970년대에 독일로 건너갔던 광부와 간호사 출신이며, 현재 교포 사회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독일뿐 아니라 미국, 캐나다 등 여러 나라로 이민 간 사람 중에도 파독 광부, 간호사 출신이 많다. 지금은 2세대, 3세대로 이어져 수만 명의 광부, 간호사 출신 가족들이 해외에서 살고 있다. 독일에 남은 광부와 간호사 중 일부는 중산층 이상의 생활을 하고 있고, 많은 한국인 2세들이 독일 사회의 엘리트 그룹에 속해 있다. 한국 교포 사회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더 굳게 자리 잡고 있다.
반면 대한민국에서 파독 광부 및 간호사 출신들의 상황은 그리 좋지 못하다. 독일 교포들은 최소한의 연금으로 대부분 기본 생활은 영위하지만, 한국으로 귀국한 동료 중 일부는 경제, 건강, 주택 등의 문제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파독 광부와 간호 인력을 위한 「파독 광부·간호사·간호조무사에 대한 지원 및 기념사업에 관한 법률」(약칭: 파독광부간호사법)의 시행령이 2021년 6월 10일에 제정됐다. 현재 기념사업으로는 기념관 건립, 기념공원 및 기념탑 건립, 기념 추모공원사업이 추진되고 있으며, 그 밖에도 파독 광부 및 간호사의 처우 개선을 위한 노력은 계속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