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지 115년이 흘렀다. 부당한 재판을 받은 안중근 의사는 뤼순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안중근 의사가 뤼순 감옥에서 생을 마감하기 전에 집필한 동화평화론은 지금까지 우리에게 많은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글 | 이주화 안중근 의사기념관 학예연구관
올해로부터 115년 전인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安重根, 1879~1910)은 북만주 하얼빈역에서 일본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를 사살했다. 이토는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 초대 총리에 오른 이래 총리를 네번이나 역임하고,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이후 초대 한국 통감을 지낸 당시 일본 정계의 우두머리였다.
안중근의 의거 이후, 일본인들은 메이지(明治)헌법의 초안자이며 근대국가 일본의 발전을 주도한 정치가로서 최고의 위치에 있던 이토를 사살한 안중근을 ‘흉한(兇漢)’으로 매도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한국의 보호국화와 식민지화를 주도한 침략의 원흉 이토를 처단한 안중근을 ‘만고(萬古)의 의사(義士)’로 존경했다.
안중근은 이른바 을사늑약으로 외교권 등 한국국권이 일부 침탈당한 것을 실력의 부족 때문이라 생각하여, 교육진흥과 국채보상 등 실력의 양성으로 국권을 회복하고자 애국계몽활동을 했다. 그러나 그는 통감 이토의 강압적인 내정간섭과 정미조약 체결 이후 망국의 기운이 도는 상황에서 실력양성에 의한 국권 회복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그는 의군(義軍) 활동과 같은 무장투쟁에 이어, 통감 정치를 추진한 이토 처단을 통하여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성을 세계에 알려 한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에 이바지하고자 했다. 이러한 목적으로 사형을 앞두고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집필하였다.
안중근이 뤼순 옥중에서 쓴 논설인 「동양평화론」은 서론, 전감, 현상, 복선, 문답 등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안중근의 사형이 예상보다 빨리 집행되어, 서론과 전감만 기술하였으므로, 그가 구상한 「동양평화론」의 전모를 담고 있지는 않다.
그런데 다행히도 1910년 2월 17일에 이루어진 안중근과 일본 관동도독부 고등법원장 히라이시우지토(平石氏人)와의 면담기록인 「청취서」에 그가 구상한 「동양평화론」의 구체적 실천 방안이 들어 있다. 「청취서」에 의하면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의 내용과 동북아연합 구상은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로 뤼순항을 한·청·일 동양 삼국의 공동군항으로 만들어, 삼국연합군을 편성하고, 외국어 교육을 통하여 3국을 우방 또는 형제국 감정을 갖도록 만들자고 제안했다.
둘째로 한·청·일 3국의 대표를 뤼순에 파견하여 ‘동양평화회의’를 조직하고, 뤼순을 ‘평화의 근거지’로 한다는 것이다. 당시 일본이 점유하고 있는 분쟁지역인 뤼순에 평화기구의 본부를 두어, 동양 삼국의 항구적인 평화를 구축하자는 의미이다.첫째로 뤼순항을 한·청·일 동양 삼국의 공동군항으로 만들어, 삼국연합군을 편성하고, 외국어 교육을 통하여 3국을 우방 또는 형제국 감정을 갖도록 만들자고 제안했다.
셋째로 한·청·일 3국에서 ‘동양평화회의’회원을 모집하여 그 회비로 은행을 설립하고, 각국이 공용하는 화폐를 발행하여 금융과 재정을 원활히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청·일본이 3국 공동은행을 설립하고 3국 공용화폐를 발행하여 3국을 금융공동체로 만들자는 주장이다.
넷째로 한국과 청은 일본의 지도로 상공업을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당시 근대화에 선발주자였던 일본의 협력으로 한국과 청의 경제를 성장시켜 함께 근대국가에 진입하자고 역설했다.
다섯째로 한·청·일 3국의 황제가 로마교황을 방문하여 함께 황제의 관을 쓴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계 종교인 천주교를 활용하여 한·청·일 삼국이 독립국으로서 세계적인 공인을 받고, 동양평화를 영구적으로 지속하자는 의미가 숨어 있다.
요컨대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한국·청·일본을 회원국으로 하는 ‘동양평화회의’를 창설하여, 군사연합, 상호 어학교육, 공동은행, 공용화폐, 그리고 경제협력을 통하여 동양 삼국이 항구적인 평화와 번영을 추구하자는 일종의 ‘동북아연합’ 구상이었다. 그리고 안중근의 제안은 ‘동북아연합’이 동북아 국가공동체로서 모범을 보여, 동양 삼국에 인도·태국·베트남·미얀마 등 아시아 각국이 참여하는 ‘아시아연합’으로 확대되는 구상이었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한국·청·일본을 회원국으로 하는‘동양평화회의’를 창설하여,
군사연합, 상호 어학교육, 공동은행,공용화폐,
그리고 경제협력을 통하여 동양 삼국이 항구적인 평화와 번영을 추구하자는
일종의 ‘동북아연합’ 구상이었다.
1910년에 제시된 안중근의 ‘동북아연합’ 또는 ‘아시아연합’(AU)의 구상은 82년 뒤인 1992년에 시작된 ‘유럽연합’(EU)의 구상과 흡사하다. 유럽 각국은 1992년에 네덜란드 국경도시 마스트리히트(Maastricht)에서 조약을 체결하여 ‘공동통화정책’을 채택했다. 1993년에 마스트리히트 조약이 발효됨으로써 ‘유럽연합’이라는 유럽 국가공동체가 탄생했다. 그 뒤 공동은행인 유럽중앙은행(ECB)이 설립되고, 공용통화인 유로(Euro)가 발행되었으며, 2002년부터 유럽은 단일화폐를 사용했다. 그 후 유럽연합(EU)은 의회, 군사기구, 대학, 은행, 화폐를 공유하여 유럽평화에 이바지하게 되었다.
안중근이 「동양평화론」에서 말하는 동양은 기본적으로 한국·청국·일본의 동양 삼국 곧 동북아를 지칭한다. 그리고 넓은 의미의 동양은 한국·청국·일본과 인도·태국·베트남·미얀마 등을 포함한 아시아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가 말하는 동양평화는 동북아의 평화, 나아가 아시아의 평화를 뜻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안중근이 “나는 한국을 위하여 나아가 세계를 위하여 이토를 죽인 것”이라 했고, “나는 한·일 양국이 더 친밀하게 되고 평화로워져서 오대주에 시범이 될 것을 희망했다”고 했으며, “나는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고 한국의 독립을 공고히 하여, 한·청·일 삼국이 동맹하여 평화를 부르짖고, 8,000만 이상의 국민이 서로 화합하여 점차 개화의 역으로 진보하고, 나아가 구주와 세계 각국과 더불어 평화에 진력하면, 시민들이 안도할 것으로 생각했다.”고 했듯이, 그의 동양평화는 세계평화로 외연이 확대된다. 곧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한국의 독립을 전제로 하는 동북아의 평화, 그리고 아시아의 평화, 나아가 세계의 평화를 추구한 것이다.
안중근은 서양 제국주의의 침략을 동양 삼국이 공동으로 방어하자고 했지만, 서양을 공격하자고 하지는 않았다. 그는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여 무장투쟁을 했지만, 일본국민을 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안중근은 사적으로 ‘인간 이토’를 살해한 것이 아니라, 한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 한국 의군중장으로서 침략의 원흉을 제거한 교전 행위를 했다. 그는 기본적으로 천주교적 인간애와 평화를 사랑하는 사해동포주의, 세계주의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일본이 힘으로서가 아닌 도덕적으로 존경받는 선진국이 되고,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을 이끄는 선도국이 되기를 바라는 일본에 보내는 ‘동양책략’의 메시지였다.
오늘날 한국의 남북은 민족이 화합하지 못하고 서로 다른 체제 아래서 군사적으로 대립하는 상황에 있다. 한·중·일 삼국은 여전히 역사문제, 영토문제 등으로 갈등을 빚고 있다. 그리고 일본과 중국은 동북아 패권을 두고 경쟁상태에 있다. 여전히 동북아는 대립과 갈등, 경쟁으로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따라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곧 ‘동북아연합론’은 동북아의 긴장 상황을 평화상태로 전환 시키는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의 이상이 오늘날에 구현된다면, 동북아의 항구적인 평화와 번영이 이루어지고, 아시아의 평화, 세계의 평화가 이루어 질 수 있을 것이다. 안중근의 생각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