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이주화 안중근 의사기념관 학예연구관
1879년 9월 2일, 대한국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에서 한 남자가 태어나니 성은 안(安)이고 이름은 중근(重根)이며 자(字)가 응칠(應七)이다.
(성품이 가볍고 급한 까닭에 이름을 중근이라 했고 가슴과 배에 검은 점이 일곱 개 있어서 자를 응칠이라고 했다.)
1897년 빌렘 신부로부터 ‘토마스(도마)’라는 세례명을 받고 선교활동을 하면서 인간의 존엄과 사회의 구원에 눈뜨다. 이후, 대학 설립을 건의하는 등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던 안중근은 정교분리를 설파하며 한국의 독립문제에 관여하지 않으려는 신부들과 논쟁을 벌이다.
1905년 러일전쟁이 끝나고 을사늑약이 강제되자 국제정세를 파악하고자 상하이로 떠난 안중근은 아버지가 별세하는 등의 시련을 겪는다. 일제 침략을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이후 국권회복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게 된다.
1906년 진남포로 이사하여 삼흥학교를 세우다. 1907년에는 돈의학교를 인수하고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이 되어 나랏빚을 갚는 데 참여하다. 이어서 서우학회에까지 가입해 교육운동과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하던 안중근은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고종이 폐위되고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무장투쟁을 위해 국외 망명을 떠난다.
1908년 연해주 연추(크라스키노)에서 최재형, 이위종 등과 동의회 발기인으로 참여하다. 7월에는 연해주의병 우영장이 되어 국내진공작전을 펼쳤으나, 중과부적1)으로 패퇴하다.
1) 적은 수로 많은 적을 대적하지 못함1909년 2월, 연추 하리에서 11명의 동지들과 단지동맹을 맺고 태극기에 혈서로 “大韓獨立” 네 글자를 남겨 국권회복에 대한 결연한 의지를 다지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근대 일본의 설계자로 제국주의 침략의 상징이던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역에서 쓰러뜨리고 “코레아, 우라!”를 삼창하다.
일본 관동도독부 뤼순지방법원으로 이송되어 관선 변호인만 허용된 부당한 재판을 받다. 이 과정에서 ‘이토의 죄악 15개조’와 ‘의거의 이유’를 밝히는 등 정연한 논리로 외신은 물론 일본인의 경외심을 받아내다.
치열한 법정투쟁에도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고는 옥중에서 자서전 「안응칠역사」와 미래의 동북아 평화구상을 밝힌 「동양평화론」을 집필하다. 그리고 후세에 대한국인의 혼을 담은 유묵을 여러 점 남기다.
1910년 3월 26일, 31세의 청년 대한국인 안중근은 뤼순 감옥에서 고향에서 보내온 한복 수의를 입고 순국하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원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하지만 아직까지 안중근의 유해를 찾지 못해 유언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