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 낯설게 보기

체험하며 배우는 한국현대사 수업

상설전시 체험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4층에 자리 잡은 상설전시 체험관은 관람객이 지금의 자신과 다른 세대, 다른 누군가로 그때 그 시절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외국인은 우리의 현대사가 고스란히 담긴 체험관을 어떻게 바라볼까? 영국인 폴 카버 씨의 글을 통해 그 생각을 엿본다. (편집자 주) 폴 카버 유튜버, 프리랜서 번역가 / 사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 체험관의 ‘건강이 최고’ 섹션

어른들에게 배운 나만의 현대사 수업

어렸을 적 영국에서 친가와 외가를 자주 방문했던 나는 조부모에게 ‘그 시절’ 이야기를 자주 물어봤다. 친할머니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출생해 고아로 자랐는데 친할아버지를 만나 함께 영국으로 이민을 온 이후 영국에 정착했다. 조부모는 당시 영국 생활이 힘들었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민했을 무렵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안 됐던 터라 영국은 배급제를 시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농장을 운영하는 집안에서 자란 외할머니는 농장 생활이나 내 어머니가 어렸을 적에 어땠는지 얘기해주고는 했다. 학교 역사 수업에서는 보통 헨리 7세, 엘리자베스 1세 또는 화약음모사건(Gunpowder Plot) 등을 다루지만 나의 현대사 수업은 조부모의 인생을 직접 인터뷰하며 터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한국에 처음 왔을 당시 내 한국사 지식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와 삼국의 통일, 고려청자,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 거북선으로 왜구를 무찌른 이순신 장군, 일제강점기 및 남북 분단을 아우르는 몇 가지 역사적 중요한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영국에서처럼 직접 들을 수 있는 생생한 역사 지식은 부족했기 때문에 이런 지식의 공백은 대부분 <클래식> 같은 영화나 ‘응답하라 시리즈’ 같은 드라마를 보면서 채워나가는 게 전부였다. 이런 과정은 아마도 한국인들이 영국인들의 일상생활을 이해하기 위해 <더 크라운 (The Crown)>이나 <스킨스(Skins)> 같은 드라마를 보는 것과 같은 맥락일 듯하다. 결과적으로 내 한국사 지식은 틀린 것은 아니겠으나 다소 부족하거나 과장됐다. 픽션 작품의 극적인 효과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과장이나 왜곡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

다른 세대의 인물이 돼 다른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경험

그렇기에 ‘세대 소통’을 주제로 한국현대사 속 여러 세대의 ‘그때 그 시절’을 구현한 체험관 전시는 내게 매우 유익한 경험이 됐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4층 체험관에 도착하면 한국이 경제 대국으로 진입하는 데 첫 발걸음이 됐던 한국의 첫 자동차, 이름하여 ‘시발자동차(1955년)’가 입구에 전시돼 있다. 전시관은 총 16개 구역으로 구분돼 있는데 이는 1950년을 시작으로 각각의 시기 동안 다양한 일상생활의 모습을 주제별로 보여주기 위함이다.

체험관에 들어서면 안내대에 비치된 기계의 버튼을 눌러서 ID 카드를 발급받는다. 이 카드를 통해 서로 다른 시대에 태어난 10개의 캐릭터 중 하나를 부여받는다. 한국은 10년이 100년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급속도로 변했기에 10년 간격을 두고 태어났더라도 인생 경험 자체가 너무 다르다. 다른 세대의 인물이 돼 다른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경험은 세대 간 차이를 이해할 수 있다는 데에도 큰 의미가 있다. 내가 받은 카드는 1968년이었다. 나보다는 조금 윗세대이지만 그래도 10년 내 차이니까 얼추 동년배라고 할 수 있겠다,

‘시대의 표어’ 섹션에는 시대별로 시민들에게 장려하는 표어들이 나열돼 있다. 각각의 메시지들은 함축적이면서 강력한 뜻을 담고 있는데, 70년전이나 지금이나 공산당·간첩 등을 경계하라는 내용은 똑같지만, 가족계획에 대한 메시지는 지금과는 정반대다. 자녀를 적게 낳으라고 권유하던 40여 년 전 포스터는 이제 국가 소멸의 위기를 피하고자 자녀를 되도록 많이 낳으라고 독려하는 캠페인으로 대체됐다.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이들 표어의 변천 과정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한국이라는 사회가 거의 빛의 속도로 변화했음을 또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 '시대의 표어’ 섹션

‘어제의 식탁’ 섹션에서는 시대나 상황에 따라 즐겨 먹었던 음식을 디지털 퍼즐 형태로 대입해 맞추는 게임 형태의 체험을 제공하고 있다. 6·25 전쟁 직후 나라가 매우 가난했을 때 먹던 싸지만 소박하고 맛있는 음식, 비 오는 날엔 막걸리와 파전, 특별한 날엔 돈가스 등 한국 사람들이 시대별, 상황별로 즐겨 먹는 음식 등을 배울 수 있다. 내가 한국에 10년 넘게 사는 동안 한식은 퓨전 식재료를 도입하는 등 여러 변천 과정을 겪은 듯하다. 요즘 유행하는 약과 이전에도 추로스(Churros), 과일소주, 민트 초코 등 유행하는 음식이 꾸준히 바뀌었는데, 아마 외국인들에게 첫 1년 동안 무엇을 주로 먹었는지를 인터뷰하면 언제 한국 생활을 시작했는지 역추적이 가능할 정도다.

‘건강이 최고’ 섹션에서는 지난 시대에 걸쳐 진행된 공중보건 캠페인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중 제일 흥미로웠던 것은 채변봉투다. 영화 <클래식>에는 두 학생이 학교에 대변 샘플을 가져가는 것을 잊어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둘은 결국 학교 근처의 숲에서 이름 모를 동물의 배설물을 대신 채취해 제출하는데 그 때문에 수일에 걸쳐 몇십 개가 넘는 회충약을 복용한다. 처음 그 영화를 봤을 때는 그저 웃기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전시회가 없다면 채변봉투에 담긴 사회적·문화적 배경을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내 상상력을 사로잡은 섹션은 ‘긴급 통화’였다. 이 전시를 진심으로 관람하려면 비치돼 있는 구식의 다이얼 전화기에 전화번호를 돌려야 한다. 이는 스마트폰에만 익숙한 대부분 방문객에게는 신기한 일일 것 같다. 공중전화에서 거는 긴급 전화번호도 대부분 사람은 걸어본 적이 없을 것인데, 성수대교 붕괴나 숭례문 화재 당시의 긴급 통화 내용도 들어 볼 수 있다.

  • '긴급통화’ 섹션

체험을 통해 한국현대사를 이해하고 싶다면

영국에는 이러한 디지털 방식의 체험형 전시관이 드물다. 그래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을 체험할 수 있는 에덴캠프현대사박물관(Eden Camp Modern History Museum)과 1900년대 광산마을과 탄광, 1940년대 영국농장, 1950년대 전형적인 영국 마을의 모습을 재현한 비미쉬북동생활박물관(Beamish, the Living Museum of the North) 등이 있기는 하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체험관과 가장 유사한 박물관은 버밍엄(Birmingham) 인근의 블랙컨트리생활박물관(Black Country Living Museum)이다. 이곳에서는 1912년 학교 교실에 앉아 구구단 테스트하기, 1920년 영화관에 앉아 영화 보기, 1950년대 시내를 걸으며 은행 업무 보기, 레코드 가게에서 당시에 유명했던 히트곡 듣기, 미용실이나 의상실에서 당시 유행하던 헤어 스타일이나 패션 스타일 공부하기 등을 체험할 수 있다.

이렇듯 영국에도 몇몇 체험형 박물관이 있지만,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체험관보다는 훨씬 아날로그 성격이 강하다. 더불어 영국은 체험형 전시일수록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데 반해,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체험관은 16개의 모든 전시에서 어른도 아이들과 똑같이 참여하고 즐기는 분위기여서 더 신선했다. 조부모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고 싶다거나, 자신의 옛 추억들을 재소환하고 싶은 사람, 혹은 한국현대사의 이해를 높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체험관 관람을 적극 추천한다.

* 이 글의 내용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공식적인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폴 카버 연세대학교 국제학대학원을 졸업했고, 한국 생활 15년차 영국 출신 유튜버 및 프리랜서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2016년부터 2021년 1월까지 서울특별시청에서 외국인다문화담당관, 글로벌센터운영팀장으로 근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