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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유의 문화를 품은 가전제품의 세계

인류는 항상 도구와 함께 발전했다. 오래전 인류의 조상이 땅 위에 정착해 도구를 사용한 이래 언제나 그러했다. 인류의 문화가 도구의 발전을 유도했고, 도구의 발전은 다시 인류의 문화를 바꾸었다. 우리나라의 문화를 반영하고 변화시킨 도구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번 호에서는 그중에서도 특히 가전제품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글 / 자료관리과 김가은 학예연구원

  • 1980년대 중반 출시된 삼성전자의 SEW-450F(일명 삼성 크리스탈 세탁기) 광고. 삶는 방식의 국내 세탁 문화를 반영해 한국형 세탁기의 시초로 손꼽힌다.

인간 고유의 문화를 총 집합시킨 가전제품

어느 학설에 따르면 사람과 원숭이는 500만 년 내지 600만 년 전에 분화했다. 본래 원숭이는 수백만 년 동안 나무 위에서 생활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빙하기가 찾아왔다. 이때 원숭이 중 어떤 부류는 따뜻한 곳을 찾아 남쪽으로 내려와 기존과 다른 생활을 시작했다. 땅 위에 내려온 원숭이들은 두 발로 곧추서게 되었고, 다른 동물과 싸우기 위해 무기를 만들어 손에 쥐었다. 즉, 도구를 만들게 된 것이다. 이후 이들은 현생 인류로 진화했다.
인류의 조상이 당시 사용했던 석기가 지금으로 치면 세탁기나 냉장고 같은 제품들이다. 제품이란 원료를 써서 만든 모든 물품을 일컫는다. 인류가 필요에 따라 만든 만큼, 제품에는 인류의 문화가 녹아 있다. 인간을 둘러싼 기후, 전통, 경제 등 물질적·정신적 환경들이 제품에 영향을 준다. 특히 의식주가 한데 어우러진 가정에서 사용하는 모든 가전제품은 인간 고유의 문화를 총 집합시킨 산물이나 다름이 없다. 박물관 소장 자료 중 이러한 문화가 반영된 가전제품에는 무엇이 있을까?

삶는 방식의 세탁 문화가 담긴 세탁기의 등장

전통적으로 한국은 삶는 방식의 세탁 문화를 영위했다. 흰 옷(白衣)을 즐겨 입던 민족 특성상 흰 옷을 가장 효과적으로 세탁할 수 있는 ‘삶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삶는 방식의 세탁 문화에는 세탁력 증가와 황변 현상을 막는 장점이 있다. 때문에 많은 시간과 노동을 요구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도 널리 행해지고 있다.
이런 세탁 문화 덕에 국내에서는 일반 세탁기에 우리 고유의 삶는 문화(빨랫방망이 효과)를 첨가한 한국형 세탁기가 탄생할 수 있었다. 1969년 우리나라 최초 세탁기인 금성사(현 LG전자)의 WP-181(일명 백조 세탁기)을 기점으로, 1980년대 중반부터는 본격적으로 한국 세탁 방식에 적합한 세탁기가 출시된다. 삼성전자의 SEW-450F(일명 삼성 크리스탈 세탁기), 대우전자의 DWF-6685AT 등이 한국형 세탁기의 시초로 손꼽힌다. 이들은 공기 방울 세탁기, 리듬 세탁기 등으로 불렸는데 세탁 수온을 95℃까지 올려 삶음으로써 표백, 살균, 찌든 때 제거 등에 탁월한 효과가 있었다. 이는 당시 일반 세탁기와 확실히 차별되는 지점이었다. 한국형 세탁기는 세탁기를 단순한 기계가 아닌, 우리의 의생활과 한국의 사회상을 담아낸 시대적 산물로 만들었다.

  • 1990년대 들어 출시된 대우전자의 세계 최초 공기방울 세탁기 광고(이경출 님 기증)

세컨드 냉장고, 김치냉장고의 자리매김

한반도를 둘러싼 자연과 풍토는 긴 추위에 적응하기 위해 말리거나 절여서 먹는 발효 저장 및 가공 음식, 본식과 후식을 모두 차려놓고 먹는 한상 문화 등 한국 고유의 전통 식문화를 만들었다. 그러나 1960년대 말부터는 고도로 경제가 성장하고, 가전제품이 보급되며 한국인의 식단이 점차 서구식 식생활로 변화했다. 이로 인해 한국인의 전통은 지키되 서양 문화가 혼합된 새로운 식문화가 등장했다. 한국식·서구식이 혼재하기 시작하면서 우리나라에는 일반 냉장고와 더불어 세컨드 냉장고 즉, 김치냉장고가 필수 가전제품으로 자리매김한다. 우리나라 일반 냉장고의 시초는 금성사(현 LG전자)에서 1965년 출시한 GR-120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1995년 만도기계(현 위니아딤채)가 김치의 옛말인 ‘딤채’란 이름으로 김장김치 맛을 내는 기술 특허를 내면서, 김치냉장고라는 한국형 냉장고가 자리를 잡는다. 김치냉장고는 일반냉장고보다 장기간 보관에 장점을 보였고, 이로 인해 한국 사람들에게는 자주 먹는 음식은 일반 냉장고에 넣되 장기간 보관용 음식은 김치냉장고에 보관하는 문화가 생겼다. 이는 한국 문화생활의 변화가 가져온 가전제품의 발달이 우리 문화생활을 또 한 번 변화시킨 지점이다.

  • 1965년 출시한 금성사의 GR-120 냉장고 광고 (이경출 님 기증)

오늘날 가전제품은 제품의 사용성과 경제성뿐만 아니라 상징성, 즉 문화를 담아내는 하나의 문화생활 양식으로 변화하고 있다. 고유의 문화가 반영된 가전제품은 일종의 상징이다. 문화의 상징체계가 도구를 사용하는 물질문화에 투영된 것이기 때문이다. 문화를 담아내지 못하는 제품은 더 이상 사람들에게 호응을 받지 못한다. 세탁기, 냉장고와 같은 가전제품들은 앞으로도 우리 문화를 담아내는 그릇으로, 사람들의 생활양식에 가장 밀착된 문화로 재탄생할 전망이다.

  • 세탁기와 냉장고 등 가전제품을 안내하는 내용이 담겨 있던 금성사의 제품 안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