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에 참전한 유엔군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너무나 유명한 덕분에 우리는 종종 그 역사적 의미를 놓친다.
물론 인류 역사상 동맹군을 결성하여 싸운 사례는 무수히 많다.
그러나 하나의 대의명분 하에 국제기구의 이름으로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진 수많은 나라가 결집하여 하나의 군대를 형성하여 상당한 희생을 감수하고 싸운 사례는 찾아보기 쉽지 않다.
6.25전쟁에 유엔군이 참전한 사실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글 | 윤덕희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조교수
유엔군 하면 흔히 미군을 떠올린다. 최근에는 ‘형제의 나라’ 튀르키예의 참전도 꽤 유명해졌다. 그러나 그 외에도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례들이 있다. 미국 다음으로 많은 전투병을 보냈으며 임진강에서 글로스터 대대의 헌신적인 방어전을 비롯한 많은 희생을 치른 영국군, 지평리 전투에서의 용맹한 활약으로 기억되는 프랑스군, 횡성 전투에서 결사적으로 저항하여 국군의 철수를 엄호한 네덜란드군, 가평 전투에서 중공군 4월 공세를 좌절시킨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군 등 16개국의 전투 부대들이 각기 이 전쟁에서 영웅처럼 활약한 이야기를 역사에 남겼다.
그 외에도 6개 나라가 대한민국에 의료지원을 했으며, 41개 나라가 대한민국에 물자지원(물자지원 38개국, 물자지원의사표명국 3개국)을 하는 등 여러 나라가 다양한 방식으로 6.25전쟁에 참여하였다. 이들 중에는 아직 제2차 세계대전의 피해를 극복하지 못한 나라들, 식민지에서 각 독립한 나라들도 상당하다. 많은 나라들이 각기 어려운 사정에도 불구하고 역사상 유례가 드문 연합을 이루었다.
모든 나라는 자기 나라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유엔군 참전을 결정할 때도 각 나라는 각국의 이해관계를 따져 보았을 것이다. 영국은 한반도에는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후복구 과정에서 미국과의 ‘ 특별한 관계(special relationship)’를 유지하고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와 같은 다른 영연방 국가들, 프랑스와 벨기에, 네덜란드와 같이 제2차 세계대전으로 국토가 점령 당했던 유럽 국가들도 사정은 비슷했다. 지중해 지역을 대표하는 두 국가인 그리스와 튀르키예는 새로이 형성되는 냉전 구도에서 소련의압박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이 이끄는 자유진영과의 연대를 강화하고 싶었다. 더욱이 둘은 전통의 라이벌이었고, 상대방에게 주도권을 넘겨줄 수 없다는 경쟁 심리도 양국 모두의 참전을 결정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냉혹하고 이기적인 국익의 논리만으로 각 나라가 유엔군으로 참전한 동기를 다 설명할 수는 없다. 영국이 미국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전쟁 이후 피폐해진 국내 상황에서 대규모 전투병을 파병하는 것, 더욱이 이미 세계대전을 겪은 자국 병사들에게 대부분은 들어본 적도 없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라고 요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의료지원국으로 참전한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는 냉전기에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1세계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독자외교를 추구하던 국가들이었다. 이러한 국가들까지 유엔군에 대거 참가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추축국에 의한 침공의 기억을 가진국가들, 그리고 대전 후 새로이 독립한 여러 국가들이 북한에 의한 명분 없는 선제 공격과 무력점령의 위기에 처한 신생독립국인 대한민국의 처지에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국익의 논리와 휴머니즘에 입각한 이타적 행위는 때로는 충분히 공존할 수 있다.
더 중요한 이유도 있다. 사실, 타국을 침공하는 행위 자체가 옳지 못한 행위로 규정된 것은 역사적으로 그리 오래된 현상이 아니다. 오히려 힘이 있는 국가가 정복전쟁을 벌이는 것은 인류 역사 대부분의 기간에 걸쳐 당연하게 여겨졌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프랑스의 나폴레옹 같은 이들이 단순히 타국을 침공했다는 이유만으로 비난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세계대전의 참화를 겪으면서 더는 이러한 전쟁을 되풀이해서는 안 되겠다는 전 세계적인 공감대가 조금씩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렇게 탄생한 아이디어가 국제기구에 의한 집단안보체제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탄생한 국제연맹은 나치 독일의 주변국 병합과 침략 앞에 철저히 무력하였다. 자체적인 강제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교훈을 바탕으로 하여 형성된 유엔은 국제연맹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였다. 유엔군의 6.25전쟁 참전은 이 피의 교훈을 잊지 않고 국제평화를 지키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었다. 6.25전쟁은 유엔이 무력으로 침략전쟁을 응징하기 위해 나선 처음이자 마지막 사례였지만, 이 한 번의 참전으로 유엔은 그 존재가치를 증명하였다. 그 결과, 그동안 드러낸 수많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유엔은 국제연맹의 전철을 밟지 않고 아직까지 존재하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유엔군의 6.25전쟁 참전은 이 피의 교훈을 잊지 않고 국제평화를 지키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었다.
6.25전쟁은 유엔이 무력으로 침략전쟁을 응징하기 위해 나선 처음이자 마지막 사례였지만,
이 한 번의 참전으로 유엔은 그 존재가치를 증명하였다.
유엔군은 6.25전쟁이 정전으로 마무리된 뒤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정전 이후 대한민국의 미래는 여전히 불안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이 결국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진 것과 같은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의 안정적인 생존을 보장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였다. 따라서 유엔군사령부는 해체되지 않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으며 현재 총 17개 국가로 구성되어있다. 사령관은 주한미군사령관이 겸직하며 부사령관은 최근 들어 영연방 국가 출신 장성들이 담당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 국가들은 한반도 위기 시에 6.25전쟁 때 그랬듯이 병력과 물자를 동원하여 참전할 의무를 지고 있다. 역사상 이렇게 오랜 기간 유지되고 있는 다국적 연합군도 없을 것이다. 이 사실이 유엔군 참전의 거대한 역사적 의미와 대한민국의 생존이 갖는 상징성을 말해주고 있다.
유엔군사령부는 철저히 대한민국의 안보를 보장하기 위해 존재하는 조직이며, 우리가 매체를 통해 종종 접하는 유엔평화유지군은 이와 성격이 전혀 다른 별개의 조직이다. 유엔평화유지군은 분쟁지역에서 중립적인 입장에서 치안을 유지하고 민간인을 보호하는 것을 주된 임무로 한다. 대한민국도 소말리아 평화유지군(1993-1994), 서부사하라 평화유지군(1994-2006), 앙골라 평화유지군(1995-1996), 동티모르 평화유지군(1999-2003), 레바논 평화유지단(2007-), 아이티재건지원단(2010-2012), 남수단 재건지원단(2013-) 등 평화유지군 활동에활발하게 참여하고 있다. 유엔의 이러한 평화유지 활동은 냉혹한 국제질서 아래에서 힘을 쓰지 못하거나 분쟁 해결에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많다. 물론 이는 앞으로 유엔의 구성원들이 더욱 치열한 고민을 통해 해결해야 할 과제다. 그러나 유엔평화유지군의 활동을 무의미하다고 할 수는 없다. 국제기구의 권위를 지니고 파견된 다국적 평화유지군은 그 존재만으로 분쟁 당사자들에게 부담이며, 최소한 분쟁의 강도를 완화시키는 효과라도 기대할 수 있다. 이러한 권위는 6.25전쟁 파병이 아니었다면 생각하기 어려울 것이다. 또한,6.25전쟁 당시 유엔군 참전의 혜택을 받았던 우리가 지금은 유엔평화유지군 활동에 적극적으로 기여하는 나라가 되었다는 점 역시 시사 해주는 바가 크다.
유엔군의 6.25전쟁 참전은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겪은 후 세계를 조금이라도 더 안전하게 만들려는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던 국제적 노력과 협력의 시작이었다. 오늘날의 우리는 그 노력 덕분에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안타깝게도, 최근 들어 국제 사회는 이제까지의 노력을 헛수고로 돌리려는 듯 점점 더 전쟁의 시대로 회귀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유엔군의 도움을 통해 살아남아 선진국의 반열의 오른 대한민국의 국제적 역할은 과연 무엇이어야 할지 우리 모두의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