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중문화는
어떻게 세계인의 대중문화가
됐을까?
한국의 대중문화는 이제 세계인이 즐기는 대중문화로 자리 잡았다. 이렇게 성장하기까지 한국의 대중문화에는 어떤 우여곡절이 있었을까? 그리고 어떻게 세계인이 즐기게 된 걸까? 일제강점기부터 최근까지 대중문화의 역사를 통해 그 이야기를 엿본다. (편집자 주) 글 강헌 음악평론가
대중문화는 글자 그대로 ‘대중’의 출현을 전제로 탄생한다. 대중의 라틴어 어원인 ‘populus’는 원로원의 귀족부터 기사, 평민을 망라하는 국가의 전 소속원을 의미했다. 이 개념은 산업혁명 이후 공화국 시대로 접어들면서 근대 사회의 운명을 결정하는 존재로 부상하게 된다.
대중문화는 소수의 특정 계급이 전유하는 문화가 아니라 바로 이 대중이 만들고 소비하는 문화다. 따라서 문화라는 상품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시장과 산업, 그리고 그 유통을 압도적으로 확산 시키는 대중매체의 출현과 성장이 필요하다.
반면 한국의 대중문화는 식민지 자본주의라는 불행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첫 페이지를 열게 됐다. 이 말은 한국의 대중문화가 오로지 자생적인 역사적 진화의 바탕 위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 먼저 서구적 근대화를 이룩한 일본의 정치적·경제적 목적에 의해 이식됐다는 것을 뜻한다. 일본은 다른 서구의 제국주의 국가와는 달리 자신의 식민지인 조선의 문화를 철저히 말살하는 정책적 기조를 식민지 기간 내내 고수했다. 식민지 조선은 앞선 서구의 문화를 일본이라는 경유지를 통해 수용하기 시작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향후 한국 대중문화의 본질을 구성하는 첫 번째 핵심이 생성된다. 바로 서구의 문화를 바라보는 ‘동경(憧憬)’의 태도다. 우리나라를 제외한 세계 대다수의 식민지국은 서구 열강에 식민화됐기에 서구를 투쟁과 극복, 나아가 증오의 대상으로 보았다. 반면 조선은 오랫동안 문화적 우월감을 지니고 있었던 이웃 아시아 국가인 일본에 식민화되는 특수한 상황이 만들어졌고, 이 과정에서 한 번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한 서구와 서구 문화를 식민지라는 비극에서 탈출시켜 줄 구원자로 인식하게 됐다. 뒤늦었지만 서구를 받아들이고 배우자는 의지가 한반도에서 폭발했다.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척사(斥邪)의 대상이었던 서구는 이렇게 우호적인 동경의 대상으로 옷을 갈아입게 된다.
비록 일본이라는 스펙트럼을 통과해 상륙한 것이지만, 서구 문화는 1910년대에서 1920년대 초중반까지 밀물처럼 조선의 가슴 한가운데에 자리 잡는다. 근대적 장편 소설의 효시인 이광수의 『무정』이 발표된 것이 1917년이고, 비록 촬영과 편집은 일본인 기술자들에 의해 완성됐지만 한국인이 제작을 맡은 최초의 영화 <의리적 구토>(‘정의로운 복수’라는 뜻인데 ‘의리적 구투’라는 설도 동시에 존재한다)가 단성사에 첫선을 보인 것은 1919년이었다.
한국의 고도 압축 성장의 대명사가 된 ‘빨리빨리’의 성정은 식민지 시대의 서구 문화 수용에도 여지없이 반영됐다. 주목할 만한 한국 대중 문화의 첫 번째 폭발을 알리는 중요한 두 사건이 1926년에 일어난다. 그해 8월 발매된 여성 성악가 윤심덕의 <사의 찬미>는 발매 직전에 터진 윤심덕과 극작가 김우진의 동반자살 스캔들로 한국 음반시장을 단숨에 열어놓았고, 두달 뒤 10월 역시 단성사에서 나운규 감독의 영화 <아리랑>이 개봉할 때는 기마경찰대를 동원할 정도로 인산인해의 장사진이 종로 거리에 연출됐다. 더불어 통속적인 연애와 추리 장르의 대중소설들이 연이어 히트하기 시작했고, 일본에서 직수입한 일종의 초보적인 뮤지컬인 신파극이 전국적으로 흥행했다.
그 어떤 것이든 조선총독부의 가혹한 검열법 아래 있었기에 ‘식민지 해방투쟁’ 같은 반체제적 주제는 온전하게 드러날 수 없었으나 예술가들은 다양한 은유와 상징으로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의도를 우회적으로 표현하려 했고, 민중은 그것의 행간을 재빠르게 읽어내는 감각을 발전시켰다. 1932년 이규환 감독의 영화 <임자 없는 나룻배>나 한국 대중음악의 첫 번째 주류 장르로 부상하는 트로트의 대표곡인 1935년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 대표 사례가 될 것이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라는 전시체제로 경직되기 전까지의 1930년대는 한국 대중문화의 첫 번째 폭발과 확산이 이루어진 시기라고 봐도 무방하다. 미국 할리우드 영화들은 현지 개봉 후 한두 달 뒤에는 경성의 영화관에서 만날 수 있었다. ‘모던 걸’과 ‘모던 보이’로 일컬어지던 이른바 서구적 문화의 세례를 받은 아베크족(젊은 남녀)은 동시대의 문화 트렌드를 적극적으로 소비하는 첫 번째 세대가 됐다. 남인수와 이난영, 백년설 등의 가수들은 현대적인 의미의 스타 지위에 올랐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전선이 확대되면서 식민지 조선은 전시 총동원 체제로 전환돼 조선어는 아예 사용이 금지되고, 천황과 황군의 숭배와 찬양 이외의 문화는 입을 다물어야 하는 암흑기로 돌입하게 된다.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조선은 다시 국권을 되찾았다. 해방의 기쁨은 한반도를 춤추게 했다. 하지만 ‘독립 만세’의 함성도 잠시, 38선 이남의 한반도에 승전국인 미군이 진주해 군정을 실시하면서 미국 대중문화가 순식간에 밀려 들어왔다. 1948년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과 1950년 6·25 전쟁은 남한의 미국 의존도를 심화시켰고, ‘G.I. 문화’1)라는 이름 아래 전국적으로 형성된 미군 기지들을 중심으로 한 미국의 대중문화 콘텐츠는 한국 대중의 일상적인 배경이 됐다. 전쟁 직후 맘보와 차차차로 대표되는 전국적인 춤열풍이 가장 대표적인 문화적 사건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가정 윤리의 파괴로 이어져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이와 같은 춤바람에 힘입어 한국적 정서를 입힌 맘보와 차차차, 탱고와 블루스 같은 한국 오리지널 댄스 뮤직이 시작됐다.
전후 복구가 어느 정도 이루어진 1960년대에는 1930년대에 이어 또다시 대중문화가 전성시대를 맞는다. 더구나 박정희의 제3공화국에서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지면서 일본 문화는 비공식적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러한 영향으로 당시 한국의 대중음악에는 일본 영향의 ‘트로트’와 미국 영향의 ‘스탠더드 팝(standard pop)’이라는 양대 산맥 구조가 확립됐다. 이미자와 남진, 나훈아가 전자의 대표적인 스타였다면 패티김과 최희준은 후자의 대표주자였다.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반에 이르면 이두 주류에 도전장을 내미는 제3의 세대가 출현 하는데 바로 당시 언론에서 명명한 대로 옮기자면 ‘청년문화’라는 새로운 물결이다.
청년문화의 주역들은 해방 후 탄생한 첫 번째 한글세대이자 당시 엘리트라고 할 수 있는 대학생들이다. 식민지의 그늘이 없는 이들은 성장하면서 서구적 교육과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구 문화의 세례를 받았고 1960년대부터 활성화된 라디오와 텔레비전, 각종 잡지 같은 대중매체에 영향받은 첫 번째 신세대라고 할 수 있다. 통기타에 장발, 청바지와 미니스커트로 요약되는 취향을 공유한 이들은 서구 문화의 문법 속에서 한국 문화의 전통적인 어법들을 결합하고자 했고, 부당한 권력과 사회적 통념에 저항하고자 했다. 최인호와 김승옥, 조해일, 송영 같은 소설가들은 물론 송창식과 윤형주, 김민기와 한대수, 양희은과 박인희 같은 포크음악의 기수들이 서울의 각 캠퍼스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이장호와 하명중, 김호선 같은 새로운 세대의 감독들도 새로운 감각으로 한국영화의 흥행 기록을 새롭게 썼다.
하지만 이들의 기세는 1975년 유신정권의 긴급조치 9호로 일순간에 저지당한다. 청년 세대의 도전에 위협을 느낀 유신 정권은 대마초 파동과 활동 금지로 이들의 싹을 모조리 자르는 문화적 분서갱유를 단행했다. 이 영향으로 다시 기존의 성인층 문화들이 왕정복고(王政復古)가 됐고, 이는 1980년대 제5공화국 시대까지 이어진다.
조용필과 안성기의 전성시대라고 할 수 있는 1980년대는 3저 호황2)과 올림픽 유치라는 사회적 환경의 변화에 발맞추어 한국의 대중문화가 산업적 기틀을 갖춘 시대다. 비로소 ‘문화산업’이라고 불릴 만한 시장 체계가 갖추어졌고 컬러텔레비전의 등장과 보급은 ‘오빠 부대’라는 신풍속도와 함께 10대를 문화 소비의 강력한 주체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1980년대의 이 10대 세대가 바로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등장한 X세대의 기틀이 된다.
올림픽은 한국 대중문화의 모든 것을 바꾸었다. 올림픽 슬로건처럼 ‘세계 속의 한국’이 된 것이다. 한국과 서구의 경계는 무너졌다. 힙합 문화로 무장해 등장한 서태지와 아이들은 1990년대 초반 ‘문화 대통령’이 됐고 팬덤 또한 단순한 오빠 부대가 아니라 사회적 영향력을 지닌 강력한 조직체가 됐다. 그리고 1996년 헌법재판소가 음반과 영화에서 사실상의 검열 기능을 수행 했던 사전심의가 위헌이라 판결했다. 이 영향으로 국내 대중문화에 본격적인 ‘표현의 자유’ 시대가 열렸음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이 판결은 한국 내에서 꼼지락거리던 한국 대중문화의 콘텐츠가 세계 시장으로 도약하는 하나의 격발제가 됐다. 그리고 개혁·개방 정책으로 시장이 형성되고 있던 중국의 대중이 한국의 드라마와 영화, 대중음악에 매료되기 시작하면서 한류의 역사가 시작됐고, 20세기 말과 21세기 초에 걸쳐 한국 대중문화의 글로벌 스탠더드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BTS와 봉준호는 미국 시장 정복의 상징적인 이름이다. 백여 년간 우여곡절을 겪은 현대사는 바로 한국 대중문화 경쟁력의 거름이 됐다. 한국 대중문화는 이제 세계인의 대중문화가 된 것이다.
* 이 글의 내용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공식적인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