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자료

찬란했던
홍콩영화의 인기

1980~90년대 한국에서 홍콩영화는 지금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 이상의 인기를 구가했다. 홍콩에서 제작되는 많은 영화가 극장에 걸리거나 비디오테이프로 출시됐고, 배우들은 내한해 TV 프로그램에 출연하거나 광고를 찍었다. 소장자료를 통해 찬란했던 홍콩영화의 시대를 들여다본다. 정리 편집실

1950년대부터 홍콩영화가 중화권 영화계의 중심이 된 데는 당시 사정이 있다.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지배하던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대만의 장제스 정권 또한 공산당에 질세라 현실 비판을 엄금하는 억압적인 문화 정책을 실시하던 때다. 그리하여 창작의 자유를 찾아 많은 영화인이 홍콩으로 망명해 영화를 만들었다. 당시 홍콩은 영국령(1997년 중국으로 반환)이어서 공산당의 영향없이 자유롭게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홍콩영화는 1960~70년대 들어 무협과 액션영화를 중심으로 아시아 지역은 물론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이소룡은 그 시절 홍콩영화의 상징적인 존재였다.

  • 당대 인기 스타였던 배우 왕조현의 사진이 들어간 책받침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특히 1980년대 들어 홍콩영화는 한 해 100여 편 이상 제작될 정도로 호황을 맞았다. 한 유명 홍콩 배우가 당시 홍콩영화 산업을 ‘백화만발(百花滿發, 온갖 꽃이 흐드러지게 활짝 핌)’에 비유할 정도였다. 성룡, 주윤발, 왕조현, 장국영, 임청하, 주성치, 유덕화 등 무수히 많은 스타가 탄생했고 그들의 영화는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당시 홍콩영화계에서 한국은 주요 시장이었던 만큼 배우들의 내한이 잦았고, 오락 프로그램과 광고계를 장악하며 거의 국민배우 수준의 대접을 받기도 했다.

  • 1980~90년대 한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홍콩영화 비디오테이프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찬란했던 홍콩영화의 인기는 19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쇠퇴한다. 여기에는 여러 요인이 있겠으나 영화 관계자들은 1997년 7월 1일 ‘중국으로의 반환’ 역시 영향을 미쳤다고 지적한다. 그때부터 홍콩영화가 중국 정부와 공산당의 영향 아래에 놓였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홍콩영화는 액션과 무협, 도박, 판타지 등 다양한 장르에서 빛을 발했고, 이는 이후 한국영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류승완과 박훈정, 이원석 등 무수히 많은 한국 영화감독이 여러 인터뷰에서 ‘홍콩영화 키즈’였다고 고백하는 것을 보면 당시 홍콩영화의 부흥이 현재 한국영화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는지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