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11월 30일 수출 실적 1억 달러 돌파를 기념하며
열린 제1회 수출의 날 기념식
© 국가기록원
역사 속 오늘

6·25 전쟁 이후
70여 년 만에

세계 무역 대국이
되기까지

대한민국 수출의 현대사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2011년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아홉 번째로 무역 1조 달러를 달성한 나라가 됐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국가 가운데에선 유일했다. 이를 계기로 대한민국은 통상 대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선진국 진입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50년대만 해도 수입과 원조에 의존하던 상황이었음을 생각하면더욱 놀랍다.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며 상처투성이가 됐던 대한민국은 어떻게 수출 강국으로 자리를 잡은 것일까?

정부 주도의 적극적인 수출 정책

대한민국은 36년간의 일제강점기(1910~1945)와 3년간의 6·25 전쟁(1950~1953)을 거치며 폐허가 됐다. 물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내수시장이 협소해 전후 복구와 원조, 수입에 의존했다. 해방 이후 한때 미군정의 관리를 받았던 대한민국은 직접 무역을 관리하게 되면서 정부 주도의 적극적인 수출지원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수출장려금을 지원하고 신시장을 개척한 기업에게 독점권을 부여하는 등의 조치를 통해 수출을 촉진했다. 무역 진흥을 통해 국가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1956년에는 국무회의에 ‘수출 5개년 계획’을 상정했고, 1957년에는 「무역법」을 공포했다. ‘수출을 진흥하며 수입을 조정하고 건전한 거래를 촉진함으로써 국제수지의 균형과 국민경제의 발전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제1조 내용에서 알 수 있듯, 국내 경제를 살리기 위한 필사적인 방안이었다. 당시 수출 품목은 쌀과 김, 돈모(豚毛, 돼지의 털) 등 1차 생산품이 주를 이뤘는데, 이 중 1960년대에도 수출이 꾸준했던 돈모는 의복 솔과 구두 솔 등 브러쉬 제조에 사용됐다.

1950년대가 무역관리 정책을 모색하는 시기였다면, 1960년대는 수출을 장려 하는 시기였다. 1962년 1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한 대한민국은 같은 해 12월 수출진흥위원회를 설치하며 본격적으로 수출주도형 개발정책을 추진했다. 또한 1961년에 「수출조합법」과 「수출장려 보조금 교부에 관한 임시조치법」, 1962년에 「수출진흥법」 등을 제정하면서 수출 진흥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그 결과 합판, 가방, 신발 등 1차 경공업 제품의 수출 비중이 크게 늘었고 특히 섬유제품은 주요 수출 품목으로 자리 잡았다. 반면 1950년대 주요 수출 품목이었던 농수산물과 광물 등의 수출은 점차 감소했다. 적극적인 수출 정책은 결과에 그대로 나타나 1964년 11월 30일에는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했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수출의 날’을 제정했다. 이 시기 대한민국은 연평균 41%의 놀라운 수출 신장을 기록하며 저개발 국가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 1977년 12월 22일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한 기념으로 광화문 네거리에 세워진 기념 아치

    © 조선일보

예상보다 빨랐던 수출 100억 달러 달성

1970년대는 수출 정책의 정착기로 기존의 경공업 제품들이 여전히 강세인 것은 물론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을 통해 기계, 선박, 철강 등의 중화학 제품들이 전체 수출의 40~50%를 차지할 정도로 증가세를 보였다. 1972년 정부는 연평균 25% 수출 증가를 유지하면 100억 달러 수출도 멀지 않았다며, 1981년을 100억 달러 수출의 해로 설정했다. 그 중심에는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이 있었다. 1973년 1월 연두 기자회견에서 당시 대통령은 ‘1980년대 초에 100억 달러 수출을 달성하려면 중화학 제품 수출이 전체의 50%를 훨씬 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제 발전을 주도할 업종 선정은 전후방 산업 연관 효과가 크고 산업 전반에 걸쳐 성장기여도가 높으며, 기술집약적인 산업으로 국제 수준에 이를 잠재력을 가진 업종에 우선을 두었다. 이에 따라 철강과 화학, 비철금속, 기계, 조선, 전자 등 6개 업종이 주도업종으로 선정됐다. 그 결과 오일쇼크를 겪으면서도 목표보다 빠른 1977년 12월 22일에 100억 달러 수출을 돌파했다. 1980년대 들어서는 1970년대와 마찬가지로 중공업 제품의 수출을 촉진했고, 연구 개발 투자와 선진 기술 도입 자유화 등을 통해 국제 경쟁력을 강화했으며, 수출품의 질적 혁신에 매진했다. 특히 컬러텔레비전과 반도체, 컴퓨터 등 전기·전자 분야 수출이 급증했다. 그 결과 100억 달러를 달성한 지 불과 4년 뒤 1981년 12월 19일에 수출 실적 200억 달러를 돌파할 수 있었다.

  • 1971년 한국무역협회가 주최한
    제2회 수출 진흥 웅변대회의 입상작을 모아 발행한 도서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 인천상륙작전을 보도한 미국 신문
    1977년 100억 달러 수출을 기념해
    대한민국 상공부에서 발행한 책자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70여 년 만에 무역 대국이 된 원동력

1990년대와 2000년대를 거치며 대한민국은 국내 외환 위기 및 세계 경제 불황이라는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중소·중견기업의 선전과 FTA 네트워크 확대, 해외시장 진출 전략 등을 통해 성장을 거듭했고 결국 2011년 12월 5일에는 무역액(수출액과 수입액을 합친 금액) 1조 달러를 달성하는 쾌거를 이뤘다. 이후에도 2012~2014년, 2017~2019년, 그리고 2021년 역시 1조 달러를 기록했다. 특히 2021년에는 299일 만에 1조 달러를 달성하며 사상 최단기간 기록을 수립했다. 주요 수출 품목으로는 반도체(2021년 10월 기준 983억 달러),석유화학(437억 달러), 일반기계(416억 달러), 자동차(364억 달러) 등이 손꼽힌다. 한때 장기 불황에 빠져 있던 조선업은 작년 상반기에 수주금액 기준 세계 1위, 수주량 기준 세계 2위에 오르며 완전히 부활했고, K-콘텐츠(대중음악,영화 등) 인기의 영향으로 식품, 화장품 등 신성장 품목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1964년 제정된 수출의 날은 ‘무역의 날’로 명칭이 변경된 후에도 11월 30일로 유지되다가, 2012년부터는 무역 규모 1조 달러 달성을 기념하고자 12월 5일로 변경됐다.

  • 수출을 목표로 생산된 포니 1400GL. 1984년 단일차종으로 50만 대 생산을 돌파했다.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됐던 국가가 70여 년 만에 세계 무역 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수출 정책 덕분이다. 하지만 그 정책이 실현될 수 있었던 데는 역시 ‘사람들’의 힘이 컸다. 나를, 가족을, 지역을, 나아가 국가를 위해 땀흘린 그 많은 ‘점’이 모이고 모여 커다란 원을 만들었다. 그 거대한 원이 우리를 지켜주고 있다.

이달의 근현대사

월별 주요 일정
11

1

국내 최초 TV 방송국 HLKZ-TV 정규방송 시작(1956)

서울 상주인구 1,000만 명 돌파(1988)

4

한글날의 모태인 가갸날 기념식 거행(1926)

9

KBS <전국노래자랑> 첫 방영(1980)

10

조선총독부, 창씨개명 공포(1939)

15

고랑포 부근에서 제1땅굴 발견(1974)

17

을사늑약 강제 체결(1905)

28

세계에서 서른세 번째로 ‘남극조약’ 가입(1986)

29

KAL 858기 미얀마 상공서 폭발, 추락(1987)

12

1

한국방송공사, 첫 컬러텔레비전 방송 시작(1980)

2

문화공보부, 영화관에서 애국가 상영 폐지 결정(1988)

3

IMF 관리 체제 돌입(1997)

12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 공식 승인(1948)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으로 스물아홉 번째 가입(1996)

15

무선호출 삐삐 서비스 개시(1982)

19

윤봉길, 오사카 형무소에서 순국(1932)

21

외무부, 해외여행 전면자유화 결정(1988)

23

공무원 채용시험 시 현역 군필자 가산점 제도, 위헌 판결(1999)

30

경무대를 ‘청와대’로 개칭 발표(19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