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
대한민국은 1948년 8월 15일 정부를 수립하며 민주주의 헌법과 제도를 갖게 됐지만, ‘민주주의’가 정착되기까지는 적잖은 시간이 필요했다.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부정선거는 그 과정에서 벌어진 흑역사 중 하나로 손꼽힌다.
정치 깡패까지 동원한 부정선거 파동은 국민의 분노를 촉발했고, 이는 4·19 혁명으로 이어졌다.
시곗바늘을 되돌려 그날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자.
이승만은 1948년 7월 20일 간선제로 치러진 1대 대선에서 한국독립당의 김구를 누르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후 1952년 7월 7일 헌법 1차 개정을 통해 간선제가 직선제로 바뀌었고 이승만은 2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또한 1954년 11월 29일 헌법 2차 개정에서는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철폐했다1). 당시 정족수 미달의 헌법개정안을 사사오입의 논리로 통과시켰고 이는 훗날 ‘사사오입 개헌’이라 불리는 계기가 됐다.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적용하지 않는 이 개정으로 이승만은 3대 대선에도 출마해 역시 무소속의 조봉암을 누르고 당선됐다.
자유당의 이승만은 1960년 4대 대통령 선거 및 5대 부통령 선거에도 부통령 후보 이기붕과 함께 출마했다. 대통령 선거 분위기는 자유당 쪽으로 흘렀다. 민주당 조병옥 후보가 대선 직전(1960년 2월 15일) 사망하고 만 것이다. 단독 후보가 된 이승만의 당선은 확실시되는 분위기였지만, 문제는 부통령 선거였다. 1875년생 이승만은 86세의 고령이어서 사후를 대비할 인물이 필요했는데 당시에는 부통령이 대통령의 권한을 이어받았다. 즉, 자유당이 부통령까지 차지하면 이승만 사후에도 집권 여당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1956년 4대 부통령 선거에서 이기붕이 44%의 득표율을 얻으며 46%의 민주당 장면에게 패배한 게 문제였다. 이에 당시 정권은 내무부 신임 장관으로 최인규를 선임하며 자유당과 함께 1959년 3월부터 부정선거에 대한 기획과 준비에 돌입했다.
부정선거의 기획은 광범위하고 구체적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최인규는 취임 직후부터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충성과 자유당 후보자 당선을 강조했다고 알려진다2). 당시 내무부는 4할 사전투표(허위 기재나 유권자 매수를 통해 투표용지를 미리 빼돌리는 것)와 3인조 또는 5인조 공개투표, 완장부대 활용, 야당참관인 축출 등을 통해 자유당의 지지율을 끌어올리고자 힘썼다. 또한 주먹패가 중심이 된 청년단체를 활용해 강압적인 선거운동에 나섰다. 이정재, 유지광, 임화수 등 소위 ‘정치 깡패’라 불린 이들은 정권과 자유당의 지지를 기반으로 폭력적인 선거 방해와 강요 등을 일삼았다. ‘정·부통령은 동일 정당에서 나와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당선돼도 따르지 않겠다’3)는 의견을 밝힌 이승만의 담화문(1960년 2월 13일)은 당시 분위기를 짐작케 한다.
이런 와중에 1960년 2월 28일에는 대구에서 민주화운동이 터졌다. 민주당 장면 후보가 대구 지역으로 선거 유세를 나서려 하자, 당시 정권은 학생들의 참여를 막기 위해 일요일임에도 강제 등교시켰다. 이에 분노한 대구 시내의 8개 고교 학생들이 시위를 벌이며 2·28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국가권력을 총동원하며 대대적으로 진행된 3·15 부정선거는 결국 믿을 수 없는 득표수로 이어졌다. 개표가 시작되자 자유당의 득표율이 95~99%까지 치솟는 지역이 나온 것이다. 터무니없는 집계에 놀란 자유당은 득표수를 하향 조정하라고 지시했다. 결국 최종 집계에서는 이승만이 88.7%, 이기붕이 79%를 득표한 것으로 조정돼 발표했다. 선거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의 분노는 행동으로 표출됐다.
3월 15일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그리고 그때 참여했던 마산상업고등학교 재학생 김주열은 행방불명됐다가, 실종 27일 만인 4월 11일 창원시 마산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알루미늄제 최루탄이 눈에 박혀 사망한 채로 발견됐다. 고등학생이었던 김주열의 죽음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사람들은 분노했고, 이것이 도화선이 돼 4·19 혁명으로 이어졌다.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며 혁명의 움직임을 막고자 했지만, 학생과 교수, 시민까지 나선 대대적인 움직임에 12년 동안 나라를 통치했던 이승만은 4월 26일 하야 성명을 발표하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물론 4·19 혁명이 모든 문제점을 개선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과정과 시행착오가 차곡차곡 쌓이며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2022년 현시점까지 다다랐다. 사람들이 경험을 통해 무언가를 깨우치고 배우듯,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도 지난 잘못과 도전에서 배우며 성장했다. 물론 그 성장의 중심에는 국민이 있다. 대한민국 헌법의 제1조 제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1948년 최초로 제정된 헌법에서부터 존재했다. 처음에는 제2조에 위치했다가, 1963년 헌법이 개정되면서 제1조 제2항으로 자리를 옮겼다.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국민이 곧 권력임을 잘 알고 있었던 셈이다.
3월 | 1일 |
민족 대표 33인의 독립선언서 낭독, 항일만세운동 3·1 운동 발발(19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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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
헤이그 특사 이상설 순국(19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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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
도산 안창호 서거(1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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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
6·25 전쟁 중 한국군과 유엔군, 서울 재탈환(19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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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
3·15 부정선거(19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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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
방정환, 순수 아동 잡지 『어린이』 창간(19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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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
한국프로야구 출범(19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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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
어머니날에서 어버이날로 개칭(19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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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 2일 |
항공독립운동가 안창남 사망(1930) |
3일 |
제주 4·3 사건(19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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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
식목일 제정(19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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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
국내 최초 농지개혁 실시(19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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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
서재필, 『독립신문』 창간(18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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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19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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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
전쟁으로 파괴됐던 서울 YMCA회관 완공(19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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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
4·19 혁명(19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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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
순종 승하(19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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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
윤봉길 의사 의거(193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