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아 이노션 CCO
프로필 사진 촬영차 만난 김정아 이노션 CCO(Chief Creative Officer)가 건넨 명함에는
‘Discover Beyond’라는 문구와 함께 빈 괄호가 그려져 있다.
김정아 CCO는 1996년 광고 일을 시작한 이래 줄곧 그 빈칸을 채우기 위해 노력했다.
광고대행사 이노션의 CCO가 돼서는 칸 라이언즈와 클리오 어워드, 애드페스트 등 국제광고제를 휩쓸었다.
국내는 물론 아시아에서도 주목받는 광고인이 됐다. 이제 그는 빈 괄호에 무엇을 채워 넣고 있을까.
시선 너머에서 무엇을 발견했을까.
사진 김성재(싸우나스튜디오)
저는 광고대행사 이노션에서 제작총괄을 맡고 있는 김정아입니다. 카피라이터로 시작해서 CD(Creative Director), ECD(Executive Creative Director)를 거쳐 몇 년 전부터는 CCO로 일하고 있어요. 5개의 센터로 구성돼 있는 제작부문 전체를 이끄는 동시에, 현업에서 CD로서의 역할도 겸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기업 PR이나 사회공헌 캠페인들을 주로 담당하고 있죠.
사실 아직까지도 자신만만한 확신은 없어요. “잘하고 있는 걸까? 이게 최선인가?” 하고 여전히 스스로에게 자주 물어요. 순간순간 온 힘을 다해 진심으로 일하는 것, 내어놓는 아웃풋 속의 결점을 조금이라도 더 줄여가는 것. 그뿐이죠.
카피라이터를 거쳐 CD가 된 이후 맡았던 기아자동차 브랜드 광고, 현대카드, 팬텍의 스카이폰 프로젝트 등 기억에 남는 광고가 많지만 하나를 손꼽자면 2013년 현대자동차 쏘나타 캠페인 광고예요. 차가 등장하지 않는 차 광고 스토리보드를 광고주에게 보여줬는데 다행히 반응이 좋았어요. 차 안 운전석에서 바라본 비 오는 날의 거리 풍경이 비주얼의 전부였고, 차창과 차 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담은 게 오디오의 전부였어요. 키(key) 카피는 ‘쏘나타는 원래 그렇게 타는 겁니다’ 였죠. ‘빗방울’, ‘아침안개’, ‘가을단풍’ 등 3편을 시리즈로 만들었는데 그해 대한민국광고대상에서 대상을 받았어요. 차 한 대를 몽땅 뜯어 실제 빗방울을 떨어뜨려 가며 사운드를 일일이 녹음하고 믹싱해서 만드느라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기존 차 광고 화법에서 벗어나 제가 원하는 대로 만든 작품이었기에 더 애착이 갔고, 평가가 좋아서 많은 자신감을 얻었어요.
처음 CD가 됐을 때는 광고주가 내준 숙제를 잘 해결하는 데 집중했어요. 더 유니크하게, 더 임팩트 있게 만들고 싶었죠. 연차가 쌓이면서 이제는 “어떤 것이 숙제가 돼야 할까?” 라는 질문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세상에 진짜 필요한 게 무엇인지 들여다보고, 해당 브랜드가 브랜드답게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무엇일지 집중해요. 본질과 공감이 가장 중요하죠. 멋지고 아름다운 게 아니라 우리를 위해 옳은 것, 필요한 것을 화두로 삼아 공감을 얻어내려고 해요. 사람들의 시선보다, 마음과 생각을 오래 잡아두고 싶으니까요.
‘광고’라는 단어로 제가 하는 일을 규정짓기 어려워진 지 이미 오래됐어요. 기업의 브랜드 활동과 관련된 모든 것을 맡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브랜드의 생각을 전하고 제품이나 서비스가 가진 Why를 잘 담아 소통하는 것, 새로운 화두를 발굴하고 브랜드 가치를 키우기 위해 만들어내는 모든 행위가 요즘 광고대행사와 크리에이터들이 하는 일이에요.
기업과 브랜드가 좋은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면 소임을 다한 것이라 믿던 시절은 이제 지났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기업이 사회와 환경, 공동체 이슈에 대해서도 그 책임을 다하길 원합니다.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 제 몫을 하는 브랜드에 지지를 보내고 그런 브랜드의 제품을 구매하죠. 앞으로의 모든 마케팅 활동은 이 관점을 빼놓고는 논하기 어려울 거예요.
최근 아시아태평양광고제 심사에서 접한 타이항공의 광고를 예로 들어볼까요? 그들은 코로나19로 타격을 입었는데도 비행기 이용보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장려하는 광고를 보여줬어요. 항공사 앱을 다운로드 받고 집에서 100미터 이내 위치에 4시간 동안 머물면 일정 마일리지를 적립해주는 내용이었어요. 사회의 문제를 그 브랜드다운 방식으로 해결하고자 힘을 보탠 동시에, 팬데믹 상황에서 느슨해질 수 있는 고객들의 로열티를 제고시켰고, 결국 깊은 감동까지 이끌어냈죠. 제가 생각하는 좋은 광고란 이처럼 기업이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개별 브랜드가 가진 목표 또한 소홀히 하지 않는 광고예요.
한국 광고의 역사를 하나로 꿰어 조망하는 기회는 흔치 않기에 기대가 큽니다. 단순한 시계열 광고 아카이브 외에도 광고에 담긴 시대상과 광고산업을 함께해온 광고인들의 발자취도 되짚을 수 있다면 더욱 좋겠습니다.
세상에 나온 결과물 말고 작업이나 논의 과정에서 무수히 버려지고, 뒤집히고, 퇴짜 맞은 시안들을 모아서 전시해보면 어떨까요? 광고주 테이블까지 갔다가 장렬히 전사한, 혹은 거기까지도 못 가보고 회의실 벽에 붙어 리뷰와 함께 생을 다한 아이디어들이 정말 많을 테니까요.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닌 ‘누군가’를 위한 광고를 만들고 싶습니다. 모호한 무난함, 다수를 앞세운 무심함에서 벗어나,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 공동체의 새로운 가치를 찾아내 브랜드와 결합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싶어요. 브랜드가 세상을 이롭게 하도록 돕는 아이디어들을 계속 궁리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는 ‘경험하기 위해서’라고 믿어요. ‘경험 수집가’라는 말은 제가 스스로를 규정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광고인으로서 오래 자리를 지킬 수 있는 것도, 이 일에서 계속 새로운 경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에요. 역할은 같아도, 해야 할 일은 한 번도 같았던 적이 없거든요. 시장 상황도, 브랜드의 환경도, 목표 타깃이나 예산도, 트렌드도 매번 바뀌어요. 힘든 일이지만, 그래서 더 즐거워요.
요즘 제 리스트 최상단에는 농부가 있어요. 제가 좋아하는 버섯을 직접 키워보고 싶어요. 여행에 목을 매니까 일단 떠돌이로 몇 년을 살아볼 수도 있겠네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소리’를 채록하는 일도 하고 싶어요. 제 ‘최애’ 장난감이 레고라, 레고 프로페셔널에 도전해보고 싶은 생각도 있습니다. 나이와 연차가 쌓이고 책임이 두꺼워지면 ‘내키는 대로’가 안 되거든요. 언젠가는 다시 ‘내키는 대로의 나’로 돌아갈 그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