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광고는 ‘고백’이라는 헤드라인을 내걸고 등장했다.
“덕상세창양행고백(德商世昌洋行告白)”이라는 이 헤드라인은 “독일 무역회사 세창양행이 알립니다.”
정도로 풀어쓸 수 있다. ‘고백’이 알리고(告) 아뢰는(白) 단어 그대로의 의미로 쓰였다.
우리나라 첫 광고는 가죽,담배,서양직물 등 세창양행이 사고파는 물건들과‘아이나 노인이 온다해도 속이지 않겠다’는 회사의 철학을 알리고 아뢰었다.
그리고 얼마 뒤, ‘(광고주가) 여러 사람에게 알리고 아뢰는 이야기’는 일본에서 온 ‘광고(廣告)’라는 단어의 정의(定義)가 됐다.
글 송은아 KOBACO 광고박물관 광고교육팀 팀장
광고의 목적은 기본적으로 여러 사람에게 광고주의 제품 또는 서비스, 혹은 광고주의 철학이나 가치, 이미지를 알리는데 있다. 그렇다면 광고가 알리는 것이, 과연 그것뿐이었을까. 광고가 어떤 제품이나 서비스를 알린다고 한다면, 광고를 시대순으로 늘어놓았을 때 특정 시대에 우리 경제를 주도한 제품이나 서비스가 보이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알려줄 것이다. 세창양행의 광고 이후 이어진 일련의 무역상, 상점들의 광고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서양 문물이 밀려오던 조선의 모습을 반영한다면, 일제 강점기부터 1960년대까지 오랫동안 광고시장의 1위 자리를 점령해온 제약 광고는 위생 관념이 부족해 각종 전염병과 병증에 시달렸던 당시 우리나라에 급하게 필요했고, 그래서 많이 만들고 팔린 상품이 ‘약’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지금도 약국에서 만날 수 있는 동화제약 부채표 활명수는 1897년에 처음 등장했다. 부채표가 상표 등록된 해가 1910년인데 1929년에 ‘이 약을 사실 땐 반드시 부채표를 주의’하라는 광고가 나온다. 당시 치열한 유사 약품과의 경쟁에서 앞서고자 일찌감치 제품을 식별하는 ‘브랜드’를 붙인 것이다. 1959년에 만들어진 활명수의 첫 TV 광고 ‘만화’ 편을 봐도 원조 부채표를 달라는 내용이 담겼다. 국내 최초로 바르는 소염제 ‘안티푸라민’ 등을 개발한 유한양행은 1938년 “만천하 독자에게 고함”이라는 전면 광고를 내놓는데, 이 광고에서 유한양행은 약의 정확한 사용 방법 등과 함께 ‘민중의 복리 증진’을 위해 노력한다는 기업 이념을 천명한다. 자양강장제, 소화제류, 성병 치료제, 진통소염제 등이 초기 제약 업종의 주요 광고 제품이었다. 1960년에 들어선 박카스, 아로나민처럼 아직도 애용되는 의약품들의 광고가 등장했다.
1970년대가 되면, 소비재가 제약 업종의 자리를 차지한다. 식품, 화장품, 생활용품, 가전용품 등 개인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재화들이 신문 지상과 브라운관을 장식하게 된 것이다. 그 시대를 상징하는 주요 광고 중 하나가 바로 코카콜라 광고다. 1960년대 후반 우리나라에 본격 상륙한 코카콜라는 곧 칠성사이다가 자리 잡고 있던 청량음료 시장의 새로운 강자이자 미국 문화의 상징이 됐다. 코카콜라 광고는 ‘전략’과 ‘캠페인’의 개념을 한국 광고계에 알려준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마시자 코카콜라’, ‘오직 그것뿐’ 같은 슬로건과 함께 풍요로우면서도 경쾌한 미국 문화를 한국적으로 변용해낸 성공작으로 떠올랐다.
1970년대 후반 이후에는 가전제품 광고가 전면에 부상한다. LG전자의 전신인 금성사가 설립된 것이 1958년, 삼성전자가 설립된 것이 1969년이다. 금성사가 국내 최초로 선풍기나 냉장고, 흑백 TV, 에어컨, 세탁기 등을 만든 것은 1960년대이지만, 이러한 ‘생활가전’이 집마다 들어앉기까지는 가계소득이 일정 수준까지 올라야 했다. TV가 100만 대를 넘어선 때가 1973년이었고, 1977년에는 우리나라의 1인당 GNP가 1,000달러에 이를 뿐 아니라, 수출이 100억 달러를 돌파한다. 이 무렵부터 금성사와 삼성전자의 불꽃 튀기는 광고 전쟁이 시작됐다. 금성사와 삼성은 본래 관계가 좋았으나 삼성이 뒤늦게 전자산업에 진출하면서 사이가 틀어졌고, 그 불화의 증거는 광고에 여실히 드러났다.
예컨대, 금성사가 ‘기술의 상징 하이테크 금성사’라고 하면, 삼성전자가 ‘첨단기술의 상징 삼성 가정용품’이라고 되받고, 그걸 다시 금성사가 ‘최첨단 기술의 상징, 금성 칼라 TV’라는 식으로 갚아나갈 정도였다. 1980년대 전자 양강의 시대를 기념하는 광고 캠페인이 바로 금성사의 ‘테크노피아’ 시리즈와 삼성전자의 ‘휴먼테크’ 시리즈였다. 그들의 경쟁 의식은 2000년대 이후로도 이어졌다.
1990년대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광고시장의 중심은 휴대폰과 IT 산업이 점령하고 있다. ‘한국 지형에 강한 애니콜’은 하나의 우주(Galaxy)가 되고 ‘또 다른 세상을 만날 때는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던 스피드011은 ‘ifland’라는 불야성의 새로운 세상(metaverse)을 꾸려가고 있다. 이렇게 광고는 우리 산업과 경제의 핵심을 얼굴로 삼아왔다.
광고가 메시지를 알리고 아뢰는 방식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 1962년에는 국내 최초로 디즈니와 동일하게 선녹음 후작화하는 방식으로 작업한 초당 24프레임의 본격적인 애니메이션 광고가 등장했다. 고(故) 신동헌 화백이 만든 진로 소주 ‘파라다이스’ 편이 그것으로 이 1분짜리 극장용 광고는 선원들이 진로소주가 있는 낙원에 찾아가는 내용을 경쾌한 CM송과 함께 담아 당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신동헌 화백이 ‘신동헌 프로덕션’을 세우고 만든 광고 애니메이션이 연간 100여 편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그가 1967년 국내 최초의 장편 만화영화 <풍운아 홍길동>을 만들 수 있었던 데는 광고에서의 성공이 큰 힘이 됐던 셈이다.
CM송도 빠질 수 없다. 1970년대 초반 가요계의 판도를 뒤바꾸던 통기타 가수들이 대마초 파동으로 인한 활동 규제 여파로 CM송 업계에 진출하면서, 광고계는 CM송의 시대를 맞았다. “하늘에서 별을 따다 하늘에서 달을 따다 두 손에 담아드려요~”, “열두 시에 만나요, 부라보콘” 같은 CM송은 서정적인 멜로디 또는 경쾌한 음률, 젊은 가사 등으로 광고계를 휩쓸었을 뿐 아니라 입에서 입으로 불리는 히트곡들이 됐다.
광고 카피가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오늘은 속이 불편하구나”라는 헤드라인으로 제자에게 도시릭을 양보한 선생님의 이야기를 담은 쌍용그룹의 스승의날 기업 PR 광고는 짧은 카피 속에서 어려웠던 시절, 제자를 아낀 스승, 그 스승의 사랑으로 어려움을 딛고 사회에서 활동하는 40~50대의 자부심까지 여러 애틋한 감정들을 소환하며 여러 매체에서 호평을 받았다.
광고는 이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사람들 곁에 있었지만, 지금은 어쩐지 천덕꾸러기가 된 것 같다. 앞광고니 뒷광고니 하며 구박을 받고(저렴하게 콘텐츠를 소비할 수 있도록 돕는 게 광고인데!), 아예 광고가 없는 OTT의 세계로 떠나는 사람들도 늘었다.
그렇지만, 광고는 포기하지 않는다. 광고가 꼭 필요한 사람들을 찾고, 광고를 보는 개개인의 취향과 문화를 분석하고,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시간대에 가장 잘 이용하는 매체로 모두 다른 콘텐츠를 담아 찾아가도록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광고는 당신의 취향, 소비, 문화를 가장 궁금해하고 가장 열심히 반영한다. 이제 광고는 세상을 향해 고백하지 않는다. 광고 앞에 있는 당신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그 사랑을 표현한다. 당신을 향한 고백, 그것이 바로 광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