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이야기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이

나아가야 할 방향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건립 10주년을 기념하며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미래’는 실로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의 발전에 달려 있다.
민주공화국을 향해 성큼 발을 내디딜 때, 이곳도 그동안 국가가 제대로 보듬지 못했던
소수자들의 원통함에 귀 기울이면서 국민국가 체제의 역사적 성과와 본질적 한계,
그리고 그 대안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논의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 될 것이다.
서두르지 않고 뚜벅뚜벅 한 걸음씩 나아가는 박물관이 되면 좋겠다.
글 전진성 부산교육대학교 사회교육과 교수

  • 건립 초기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외경

국가 체제 최후의 보루

설립 전부터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물리적 입지나 정치적 위상에 있어서나 늘 논란과 갈등의 한가운데 놓여 있다. 어쩌면 이는 바람직한 일인지 모른다.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은 여전히, 아마도 앞으로도 끊임없는 진화 과정을 거치며 자신의 기억과 정체성을 재편할 것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이러한 변화무쌍한 국가의 문화적 핵심기관으로서 마땅히 현존하는 국가 체제를 정당화하고 수호할 사명을 지닌다. 아무리 국가의 정당성과 기강이 뿌리째 흔들리더라도 이 기관만큼은 최후의 보루로서 제자리를 지켜야 한다.
설립 초기 이곳이 ‘정권홍보관’에 머물렀다는 일부 지적이 맞는다면, 이는 당시 대한민국이 민주주의와 인권, 자유와 평화 등과 같은 인류 보편적인 규범을 준수하는 민주공화국의 면모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만약 민주공화국으로서 손색없는 국가라면 자국의 위대함을 홍보하기보다는 애써 달성한 소중한 가치와 규범들을 역사적으로 정당화하여 공고히 하고자 부심할 것이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대한민국의 국가적 수준을 넘어서도 안 되고 넘을 수도 없다. 딱 그 수준만큼을 유지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원칙이다. 그렇지 않다면 국가의 실상을 터무니없이 호도하거나, 아니면 반국가적 국가기관이라는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

  • 건립 초기 대한민국역사박물관과 광화문 거리

대한민국의 눈높이에 부합하다

2020년 상설전시관(역사관)이 새롭게 개편되기 전까지 이곳에는 국가의 이미지와 성장지표만 있고 정작 국민은 보이지 않았다. 식민통치와 전쟁, 독재로 물든 국가주의는 국가를 떠받쳐온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배제해왔다. 본래 국민과 국가를 ‘한 몸’으로 여기는 국민국가는 민주공화국이라는 원대한 이상을 추구한다. 물론 이상과 현실은 늘 괴리되게 마련이다. 지구상 어느 국가도 그 이상적 이름에 온전히 부합하지는 못한다. 실은 국가 권력의 원천은 폭력이며 정의로운 국가는 더더욱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처럼 원천적으로 폭력적인 권력기구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좋은 기관이 될 수 있을까?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라는 명칭이 국가주의를 부추길 수 있으므로 ‘국립현대사박물관’으로 바꾸자는 일부 의견은 바로 이러한 의구심에서 비롯됐다. 물론 현재도 이곳의 영문 명칭은 ‘National Museum of Korean Contemporary History’이다. 그렇지만 영문 명칭의 어감과는 달리 통상적인 한국사 서술에서 ‘현대사’라는 용어는 분단 체제에 기승해온 반공국가에 대한 저항의식을 담고 있다. 따라서 만약 이 용어를 사용해 개칭한다면 이곳에서 다루어야 할 범위는 ‘대한민국’에서 ‘한반도’로, 내용의 핵심적 준거도 ‘국민’에서 좀 더 포괄적인 의미의 ‘민족’ 내지는 ‘민중’으로 확대돼야 하므로 박물관의 성격과 구성이 아예 근본적으로 바뀔 수밖에 없다. 이럴 경우에 정작 대한민국의 과거사에 대한 주목도는 떨어진다. 대한민국 체제가 분단의 산물인 것은 맞지만 그 수십 년의 역사가 이루어낸 위업은 결코 가벼이 볼 수 없다. 따라서 대한민국사만을 특화시킨 국립박물관은 필요하다고 본다.
2020년에 등장한 상설전시관 역사관은 국가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국가기관도 충분히 민주적일 수 있음을 입증해주었다. 국가체제에 반대하는 것만이 민주적이라는 발상은, 그간 오래도록 국가와 국민이 괴리돼 국민은 지나치게 우상화된 ‘민족’이라는 표상을 통해서만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던 사정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국민국가에 대한 공화주의적 애국심은 결코 민주주의와 배치되지 않는다. 그것은 묻지마식 국가주의와는 달리 과거에 국가가 자국과 타국에서 범한 과오를 떳떳이 거론할 수 있으며 미화 대신 비판적 성찰을 통해 애국심을 더욱 고취시킬 수 있다. 2020년 역사관 개편에 뒤이은 기획전에서 공개했던 몇몇 불미스런 과거사는 대한민국이 늘 되새겨야 할 부정적 유산이다. 어느새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자신의 과거를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을 만큼의 품과 역량을 갖추고, 대한민국의 눈높이에 부합하는 기관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2020년 재개관한 역사관

평균 수준의 역사의식이 중요

‘박물관/기념관’이란 기본적으로 체제수호적인 공공기관으로, 현실에 안주하는 평균적 수준의 역사의식을 배양한다. 더구나 국립박물관이야 말할 나위도 없이 그러하다. 이러한 평균적 수준은 대단히 중요한데, 이 수준을 하한선으로 삼아 지켜낼 수 있어야 비로소 민주공화국이 안정된 기반 위에 굳건히 설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적 기억의 최후 보루인 이곳에 대해 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과거사의 지평 너머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 그러한 요구는 전혀 다른 유형의 박물관, 특히 최근에 부상한 인권박물관(human rights museum)에서 실현되는 게 맞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국가기관이면서도 시민 중심의 기관이 된다면 물론 좋은 일이다. 국가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시민 개개인의 자유, 생명, 권리에 대한 의식을 고양시키는 것은 오히려 국민국가를 민주공화국의 이상에 다가서게 하는 일이다. 시민적 덕목을 배양하고 시민적 결사체를 활성화시켜 이룩해가는 다원주의 국가야말로 민주공화국의 완성태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시민’이 그대로 ‘국민’과 일치한다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국민국가의 틀 안에 가둘 수 없는 나머지 사람들을 가리킨다면 차원이 달라진다. 국민 다수로부터 배제되고 소외받는 빈민과 무학력자, 장애인, 성적 소수자, 종교적 소수자, 이주민, 난민, 그리고 다양한 인권 및 과거사의 피해자 등을 위한 마땅한 자리는 민주공화국에도 없다. 이것은 국민국가 체제의 본원적 한계다. 국민국가의 이념적 보루인 국립박물관은 제대로 된 국민의 기억을 구축하고 보존하고 전달하는 데 주력할 뿐이다.

  • 2021년 선보인 체험관

변화에 발맞춰 뚜벅뚜벅 한 걸음씩

향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자신의 역할을 어떻게 설정해야 옳을까? 인권박물관이나 평화박물관을 지향하는 것은 본연의 임무를 포기하는 일이다. 아무리 민주공화국이더라도 현실적인 권력체인 국가가 인권과 평화의 메신저가 될 수는 없다. 다만 그 소중한 가치들을 반대편의 공세로부터 보호하는 든든한 방패막이 되어줄 수는 있다. 그리고 그 최후의 보루가 바로 국립박물관이다. 따라서 절실한 것은 대단한 진보적 이념도, 첨단의 디지털 기법도 아니라 대한민국의 평균적 눈높이에 대한 면밀한 인식이다. 너무 앞서도, 너무 뒤처져도 곤란하다.
이를 위해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변화에 대한 감각이다. 대부분 박물관들의 문제는 의미로 충만한 과거를 ‘유물’로 고정시켜놓고는 그것이 현재와 맺는 관계까지 박제화한다는 데 있다. 현재가 계속해서 새로운 현재로 교체됨에 따라 과거의 위치도 부단히 변하는데 말이다. 이러한 본질적인 문제는 최첨단 기법을 도입하고 국내외 유관기관 및 관람객과의 소통을 증진시킨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 오로지 이 국립박물관의 정치적 책무에 대한 엄중한 자각에 의해서 비로소 극복될 수 있다. 변화하는 정치적 현실에 대한 긴장감이 사라지는 순간 ‘정권홍보관’으로 전락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미래’는 실로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의 발전에 달려 있다. 민주공화국을 향해 성큼 발을 내디딜 때, 이곳도 그동안 국가가 제대로 보듬지 못했던 소수자들의 원통함에 귀 기울이면서 국민국가 체제의 역사적 성과와 본질적 한계, 그리고 그 대안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논의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 될 것이다. 서두르지 않고 뚜벅뚜벅 한 걸음씩 나아가는 박물관이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