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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고
노래하는 박물관

나를 둘러싼 원을 뚫고 두 손에 쥔 것 <뮤지컬 갈라로 만나는 현대사>

영화 <고(Go)>에서 재일한국인 사내가 그의 아들에게 말한다. “왼손을 곧게 뻗은 상태로 한바퀴 돌아봐. 그 원의 크기가 너라는 인간의 크기다. 복싱은 그 원을 뚫어서 밖의 것을 쟁취해 오는 운동이다.” 희망은 쉽게 오지 않는다. 자신을 둘러싼 원을 뚫어야만 아주 가느다란 희망 한 줄기를 손에 쥘 수 있다. 지난 9월 23일 온라인으로 중계된 <뮤지컬 갈라로 만나는 현대사>에는 그 희망을 쟁취하기 위해 고투(苦鬪)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사진 / 박시홍

  • 왼쪽부터 배우 서종원, 이우진, 황한나, 이휴, 권오현, 노현창

다양한 뮤지컬 맛본 온라인 공연

<뮤지컬 갈라로 만나는 현대사>가 지난 9월 23일 낮 12시와 저녁 7시 30분 두 차례에 걸쳐 네이버 TV를 통해 중계됐다. 뮤지컬 갈라(작품의 특정 장면이나 넘버를 모아 보여주는 공연) 형태로 진행된 이번 온라인 공연에는 tvN <더블 캐스팅>에 출연한 노현창·권오현·이우진·서종원 배우를 비롯해 이휴 배우, 황한나 배우가 한자리에 모여 국내외 유명 뮤지컬과 영화 속 유명 넘버를 선보였다. 신은경 음악감독은 진행까지 맡아 곡을 해설하고 배우들과 함께 이야기 나눴다.
공연은 애니메이션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 <라이온킹>의 ‘Circle of life’로 첫발을 뗐다. 줄루족의 언어(Nants ingonyama ma baki thi baba, ‘여기 사자가 옵니다, 아버지’라는 뜻)로 시작하는 이 노래의 메인 보컬은 황한나 배우가 맡았고 나머지 배우들은 합창으로 웅장한 하모니를 만들어냈다. 황한나 배우는 이어 영화 <알라딘>에서 자스민 공주가 불렀던 ‘Speechless’를 불렀다. 국내 창작 뮤지컬 <스웨그에이지: 외쳐, 조선!>의 두 곡이 그 뒤를 이었는데 새로운 세상을 갈구하는 주인공 단의 노래 ‘새로운 세상’을 이우진 배우가, 자신의 갈 길을 고민하는 진의 심정이 담긴 ‘나의 길’은 이휴 배우가 불렀다. 반면 <스웨그에이지: 외쳐, 조선!>에 출연했던 노현창 배우는 이번 공연에서 뮤지컬<여명의 눈동자> 삽입곡 ‘행복하길’을 불렀고, 이어 황한나 배우와 이휴 배우가 듀엣으로 영화 <위대한 쇼맨>의 ‘Never enough’를 불렀다. 자신에게 꿈을 갖게 해준 당신 없이는 그 무엇도 의미가 없다는 노랫말이 두 배우의 폭발적인 가창력으로 강렬하게 표현됐다. 이어 배우 전원이 합창한 <레미제라블> 삽입곡 ‘민중의 노래’는 혁명에 나선 민중의 의지를 담은 곡이다. 권오현 배우는 고종과 김옥균, 홍종우의 이야기를 그린 뮤지컬 <곤 투모로우> 중 ‘저 바다에 날’을 불렀다. 죽음을 앞에 둔 김옥균이 우리 민족은 반드시 다시 살아날 것이라며 부르는 이 곡을 권오현 배우는 묵직하게 표현했다. 마지막 두 곡은 독립운동가 안중근의 이야기를 다룬 <영웅> 삽입곡으로 꾸몄다. 서종원 배우가 부른 ‘장부가’는 죽음 앞에서도 의연하고 굳건한 안중근의 의지가, ‘그날을 기억하며’는 합창곡으로 조국 독립을 염원하는 마음이 담겼다.

자신의 세계 넓히기

‘Circle of life’가 삽입된 <라이온 킹>은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과 여러 영웅 신화의 골격을 모티브로 한다. 삼촌 스카(숙부 클로디어스)에 의해 아버지 무파사(덴마크 왕)를 잃은 심바(햄릿)가 결국 제자리로 돌아와 복수한다는 내용이 그것. 왕이 존재하는 수직적인 세계에서 쫓겨났던 심바는 수평적인 세계(하쿠나 마타타)에서 행복했지만 결국 “주어진 운명(왕)을 따라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을 받아들인다. 곡 제목 ‘Circle of life(생명의 순환)’는 결국 자연과 세계의 순리에 따르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알라딘>의 자스민 공주는 정반대다. 그는 “네 자리를 지키라”는 주변의 말을 거역하고 운명에 맞서겠다는 의지를 ‘Speechless’를 통해 표출한다. 얼핏 상반돼 보이는 둘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작금의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자 고투하면서 자신의 세계를 넓힌다는 점이다.
‘나’라는 세계를 벗어났다가 되돌아온 심바, ‘나’라는 세계를 박차고 나가 오히려 자신을 지킨 자스민 공주 모두 자신의 범위를 넓혔다. 주먹을 뻗어 자신을 둘러싼 원을 뚫어낸 덕에 그들은 한 뼘 더 자랐고, 좀 더 넓은 시선으로 희망을 엿볼 수 있었다.

희망은 쉽게 오지 않는다

이번 공연의 전체 흐름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운명과 개척 사이에서 고민하지만(‘나의 길’), 이윽고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는(‘새로운 세상’) 자신과 만난다. 원하는 것은 쉽게 얻을 수 없지만(‘행복하길’, ‘Never enough’), “내일이 열려 밝은 아침이 오리라”를 외치며(‘민중의 노래’) 다시 굳은 의지를 다진다.
시대의 비극, 상대의 위협도 그 길을 막을 수는 없는 법. 그래서 그들은 다시 두 손을 불끈 쥐고 일어선다.(‘저 바다에 날’, ‘장부가’, ‘그날을 기약하며’) 새로운 세상을 향한 갈망이 그들의 세계를 더 넓고 깊게 만든다. 희망을 잃지 않아서가 아니라, 희망은 쉽게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덕분이다.
<뮤지컬 갈라로 만나는 현대사>는 지난 우리의 역사를 상기시킨다. 남북 분단과 6·25전쟁, 부정선거와 독재정권 등 지난 우리의 현대사는 매번 덫에 걸리고 튀어나온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피가 나고 땀이 솟았다. 그래도 민중은 김수영 시인의 ‘풀’처럼 다시 일어섰다. 우리는 희망이 쉽게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지금도 우리의 세계를 넓히며 더 먼 곳을 내다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