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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제 노동자 전태일의 입버릇이 실현되던 날

올해는 봉제 노동자 전태일(全泰壹)이 서울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 책자를 불태우면서 분신 항거한 지 50주기가 되는 해이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품인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영상사진집』의 사진들을 바탕으로 전태일의 지난 삶을 되돌아본다. 글 / 자료관리과 권강미 학예연구원

어린 시절

전태일은 1948년 8월 26일 대구에서 전상수(全相洙)와 이소선(李小仙)의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각지를 떠돌았고, 학업은 중단되기 일쑤였다. 1964년 전태일은 식모살이를 떠난 어머니를 찾고자 막내 여동생과 함께 서울로 상경했다. 하지만 당시 그는 어머니를 찾지 못해 노숙을 했고 여동생은 보육원에 보내는 등 생활고에 허덕였다. 이듬해 흩어져 살던 가족이 서울에서 다시 모였다. 열일곱 살이던 전태일은 가족 생계를 책임지고자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학생복을 만드는 삼일사에 견습공(시다)으로 취직했다.

  •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영상사진집』 중 일부.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1995년 박광수 감독이 연출한 작품으로 홍경인 배우가 전태일 역을 맡았다.

평화시장에서의 삶과 항거

당시 청계천 평화시장은 인근의 동화시장, 통일상가 등과 함께 전국 기성복 생산량의 70%를 차지하는 한국 의류 산업의 메카였다. 이에 반해 공장들은 모두 영세한 규모여서, 봉제1) 노동자들의 노동현장은 열악했다. 봉제 노동자들은 높이 1.5m 다락방에서 어두운 형광등 불빛 아래 하루 평균 14~15시간씩 노동을 하고, 한 달에 두 번밖에 쉬지 못했다. 공장 내에는 환기 장치가 없어서 폐 질환에 시달리는 봉제 노동자들도 많았는데, 산업재해로 인정받아 치료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고의 원인이 되었다. 실제 폐병 3기의 어느 여공은 각혈 후 해고를 당하기도 했다. 대부분 봉제 노동자의 임금은 정액 월급제가 아니라 작업량에 따라 지급되는 도급제라 초과근무수당은 받지 못했다. 봉제 노동자 중 ‘시다’라 불린 견습공은 13세에서 17세 사이의 청소년들이었는데 점심을 사 먹을 돈이 없어 굶기를 밥 먹듯 하는 이들이 많았다. 가혹한 노동현실을 목격한 전태일은 공장 밖에서는 어머니에게 이러한 노동자들의 현실을 토로했고, 공장 안에서는 자신의 차비로 끼니를 거르는 견습공에게 풀빵을 사주었다. 이렇게 그의 노동운동은 노동자에 대한 온정주의에서 비롯되었다. 주변 상황에 연민을 품고 있던 전태일은 젊어서 대구 방직공장 노동운동에 참여했던 아버지를 통해 근로기준법과 만난다. 대다수 공장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지 않음을 알게 된 그는 자신이 ‘바보’인 것을 깨달았고, 평화시장 노동자들 역시 그와 다를 바 없다 생각했다.
그리하여 전태일은 1969년 6월 재단사 모임인 ‘바보회’를 조직하고, 회원들과 함께 근로기준법을 공부했다. 또한 설문조사를 실시해 시청과 노동청에 진정(陳情)했으나 성과는 없었다. 성과 미흡 등으로 바보회 활동은 끝나고, 그는 공장에서도 해고됐다. 이후 공사장에서 일용직을 하던 전태일은 1970년 9월 재단사로 취직해 다시 평화시장에 돌아왔다. 다시 모임을 조직하고, 설문을 재개하고, 여러 언론에 노동청장에게 보내는 진정서를 투고하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언론에 봉제노동자 관련 기사가 게재됐는데 이때부터 업주와 노동청의 회유가 시작됐다. 처음에 그와 친구들은 노동청의 약속을 믿었으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결국 그들은 데모를 통해 성과를 얻고자 했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휘발유를 뒤집어 쓴 몸에 불을 붙였다. 전신 3도 화상을 입은 그는 “엄마, 내가 못다 이룬 소원들을 엄마가 대신 이루어주세요”라는 유언을 남기고서 이튿날 오전 1시 30분 세상을 떠났다.

전태일의 친구들

그의 유언을 들은 이후 어머니 이소선은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이소선과 전태일의 친구들은 정부의 협박과 회유 속에서도 평화시장의 청계피복노동조합을 결성했다. 청계피복노동조합은 다른 노동자들과 연대활동에 적극적이었고, 노동교실을 운영하며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알렸다.
그의 장례식이 있던 11월 18일에는 서울대 상과대학생 200여 명이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을 연계시켜 나가기로 결의하고 근로 조건 개선을 요구했다. 이후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이 결합한 형태의 운동이 나타났다. 평소 전문 용어로 가득한 근로기준법 해설서를 보며 대학생 친구가 하나 있었으면 원이 없겠다고 했던 전태일의 입버릇은 항거 후 이렇게 이루어졌다.

이달의 기증 유물

  • 전쟁자금 융통을 위해 발행했던 애국채권

손신자 씨가 2015년 기증한 애국채권 10건 17점은 기증자 부모님이 1940년대 일본은행에서 직접 구매한 것이다. 사진 속 ‘할증금부 애국채권’은 일제가 발행한 국채 성격으로 임시자금조정법과 1943년 조선총독부령 제324호에 의거해 발행했는데, 이자 없이 할증금만 지급되는 채권이다.
애국채권은 본래 국가경제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국외에 거주하는 자국민을 대상으로 발행하는 채권을 말하지만 일제의 속내는 다른 데 있었다. 당시 일제가 연합군과 태평양전쟁을 벌이면서 전쟁자금을 융통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애국채권은 추첨을 통해 최고 1만 배의 할증금을 부가 지급하는 방식으로 판매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쟁자금이 부족해지자 일제는 할증금부 애국채권 등 1원짜리 채권을 소화시키고자 ‘채권가두 유격대’를 결성해 길 가는 행인에게 즉석에서 채권을 강권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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