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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1980년대 저축운동

1962년 정부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시행했다. 경제개발 계획이 전개되면서 추진했던 주요 정책 중 하나가 국민들의 적극적인 저축 활동이다. 매년 10월 마지막 화요일로 지정한 법정기념일 ‘금융의 날’을 맞아 이번호에서는 1960년대 이후 범국민저축운동과 관련된 소장 유물을 소개한다. 글 / 자료관리과 김현준 학예연구원

  • 좌 : 재무부 발행 저축의 날 표어 / 우 : 1976년 저축추진중앙위원회에서 각종 금융 상품을 소개한 「저축 안내문」

국민저축계획과 저축의 날 제정

1960년대부터 대한민국 정부는 본격적인 자립경제 확립을 목표로 삼아 개인이 가진 돈을 금융저축으로 흡수하기 위한 방법을 강구했고, 이는 곧 저축을 어느 정도 의무화하는 계획으로 이어졌다. 1962년 1월 내각회의에서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서 책정한 민간저축 목표액 약 2,100억 환(圜)을 조달하기 위해 국민저축운동실시계획을 의결, 2월 국민저축조합법을 공포하며 저축 알선 조합을 설치했고 지역, 직장 등의 단위로 매일 일정액 이상을 저축하도록 했다. 이러한 분위기를 더욱 극대화하게 된 계기가 ‘저축의 날’ 제정이다. 저축의 날은 1964년 6월 대통령령으로 공포되었는데, ‘국민의 저축의식을 앙양(昂揚)하기 위해 농촌의 추수기를 전후한 적절한 날로서 9월 21일을 택해 정하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정부는 이후 1965년 9월에는 최고 예금 금리를 연 30%까지 올린 금리현실화 제도를 시행하고, 1966년 저축목표액 달성을 위한 저축의무방안이 포함된 저축증강 계획을 발표하는 등 이후 각종 금융제도를 마련했고, 그 결과 국내 저축은 점차 늘어났다.

  • 중앙일보 1978년 6월 21일 자 1면에 실린 저축추진위원회 정기예금 광고(이경출 기증)

저축추진중앙위원회의 등장과 증진운동의 확산

1970년 정부는 ‘저축 증대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고 저축추진중앙위원회를 설립한다. 저축기관, 경제단체, 사회단체 또는 그 대표자로 구성된 저축추진중앙위원회는 저축홍보자료 배포, 저축의 날 기념행사 주관 등 저축 증대를 위한 각종 사업을 계획·진행했다.
저축운동이 확산되면서 극장에서는 저축 계몽영화가, 텔레비전에서는 저축 관련 프로그램이 정규 편성되었다. 저축추진중앙위원회는 1970년대 박목월 작사, 나운영 작곡의 <저축의 노래>를 LP판으로 제작해 저축 홍보 앨범으로 보급하기도 했다. 노래 가사에는 “티끌도 모이면 태산이 된다네. 우리도 아껴 모아 잘살아보세”처럼 아껴 쓰고 저축해서 잘살아보자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고, 앨범 가사지에는 ‘세 살부터 저축하면 여든까지 가난 없다’ 등의 문구를 넣으며 저축의 의미를 홍보했다.

  • 저축추진중앙위원회에서 제작·배포한 <저축의 노래> 음반

생활 속에 스며든 저축 정신

저축운동에 힘입어 국내 저축률은 빠르게 상승했다. 1960년대 연평균 2.5%였던 가계 순저축률은 1970년대에 10.5%로 상승했고, 1980년대에는 15.4%를 기록했다. 1990년대에는 18.6%로 상승했는데, 1960년대와 비교하면 7배 넘게 증가한 셈이다.1)
1974년부터는 문교부 방침에 따라 학생 저축을 의무화했다. 당시 전국의 초·중·고등학생들은 1인 2통장제를 준수해야 했다. 저축유공자는 관련 기관에서 표창을 받았고, 모범이 될 만한 사례는 저축추진중앙위원회 홍보 책자에 만화로 제작해 배포되기도 했다.
그러나 1990년대를 기점으로 이후 연도별 저축률은 점차 하향세를 보인다. 1997년 3월 금융감독기구는 금융개혁위원회 저축 증대 방안 회의에서 저축률 하락을 두고 “경제 성장의 둔화 및 피부양 인구 비율의 하락세 둔화에 일부 기인”한다고 발표한 바 있다.2)
저축의식 증진을 위해 제정됐던 저축의 날은 현대인들의 소비패턴과 자산 관리 양상이 점차 달라지고 금융의 시대적 역할이 변화하면서 확대 및 개편을 거듭한 끝에 2016년부터는 ‘금융의 날’로 변경하게 된다.3)

  • 1984년 6월 경제기획원·저축추진중앙위원회에서 우수 저축 사례 만화를 수록하여 발행한 홍보 책자 『짠돌이와 짠순이』, 『내일의 꿈을 안고』

이달의 기증 유물

  • 한글을 사랑했던 공병우의 타자기 : 28×31×8cm 1979년 제작 한정식 기증

공병우 타자기는 우리나라 최초 안과 개인병원인 ‘공안과’를 개원했던 공병우가 1949년에 처음 제작했다. 공병우는 병원을 방문했던 국어학자 이극로와의 만남을 계기로 한글에 관심을 가졌고, 1945년에 처음 해방 후 일본어로 된 안과 교재를 한글로 번역하면서 한글의 과학성에 눈을 떴다. ‘한글이 살아야 우리나라가 산다’고 느낀 그는 의사 가운을 벗어던지고 한글 타자기를 연구했다. 결국 초성과 중성, 종성 등 한글 고유의 특성을 살리되 자주 쓰는 소리를 분석해 인체공학적으로 자판을 배치한 ‘세벌식 타자기’를 1949년 발명하기에 이른다. 그전 타자기와 달리 가로 찍기가 가능하고 세벌식으로 자판이 배열돼 실용성이 높았다. 2014년 한정식 씨가 기증한 공병우 한영타자기는 1979년 제작한 것으로 한글의 기계화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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