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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와의 전쟁, 또 다른 이야기

사회심리학자 조지 허버트 미드(George Herbert Mead)는 모든 사람에게는 ‘증오 본능’이 있다고 말한다. 때문에 정치 지도자가 국민 모두 혐오할 만한 공동의 적을 설정해놓고 국민 개개인의 증오 본능을 그리로 향하도록 유도하면서 자신을 그 ‘전쟁’의 선봉에 세우면,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1) 대한민국의 경우에도 이런 사례가 몇 번 있었다. 1961년 박정희 정권의 깡패소탕령이 그랬고, 1980년 전두환 정권의 삼청교육대가 그랬다. 그리고 1990년 노태우 정권의 ‘범죄와의 전쟁’도 마찬가지였다.

  • Ⓒ 연합뉴스

한 이등병의 폭로

1990년 10월 13일 노태우 제13대 대통령은 ‘10·13 특별선언’을 통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2012년 윤종빈 감독에 의해 영화화된 소재이기도 한 범죄와의 전쟁은 ‘민생 치안 확립을 위해 공동체를 파괴하는 범죄와 폭력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고 헌법이 부여한 대통령의 모든 권한을 동원해 이를 소탕하겠다’는 대국민 선언이었다. 그 결과 5대 강력범죄(살인, 강도, 절도, 폭력, 성폭행) 발생률이 감소했는데, 특히 폭력조직 단체 활동이 크게 줄었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치안이 안정을 이루는 데 주요한 기반을 다졌으니 그 영향력이 컸던 셈이다.
그런데 시곗바늘을 과거로 돌린다면? 범죄와의 전쟁은 조금 다르게 읽힌다. 국군보안사령부(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 분석반 소속의 윤석양 이병은 작업 문서가 담긴 플로피 디스크를 들고 탈영한 뒤 1990년 10월 4일 국군보안사령부의 민간인 사찰을 폭로했다.(당시에는 1,300여 명 사찰로 알려졌으나 2007년 국방부 과거사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국군보안사령부는 1,311명의 신상자료를 보관했고 이 중 923명을 사찰 대상에 올렸다.)2) 반정부인사 목록을 만들어 청명(淸明) 대상에 올린 뒤 감시하다가 비상계엄이 선포되는 디데이에 전원 검거한다는 ‘청명계획’이 주된 폭로 내용. 당시 국군보안사령부는 동향파악 대상자를 A~D등급으로 분류한 다음 각 인적사항과 개인 특성 등을 상세하게 기록한 신상카드를 만들어 관리하고 있었다.3) 군사정권 시절의 탄압을 다시 느낀 사람들은 분노했고 시위에 나서며 진상을 요구했다.

키워드로 보는 범죄와의 전쟁

  • 923

    2007년 국방부 과거사위원회는
    「보안사 민간인 사찰사건 조사결과
    보고서」를 통해 보안사 3처가 사회
    주요 인사 923명의 검거 및 처벌을 위해
    청명계획을 입안했고 이들 인사를
    등급별로 분류해 사찰했다고 밝혔다.

  • 9

    1990년 10월 4일 윤석양 이병이
    청명계획을 폭로한 지 9일 만에
    노태우 정권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 새질서 새생활 운동

    노태우 정권은 범죄와의 전쟁과 더불어
    ‘새질서 새생활 운동’을 함께 진행했다.
    1991년까지 지속된 이 캠페인은 올바른
    한국인상(狀)을 정립하고 밝고 건강한 미래를
    만들고자 4대 분야 12개 과제를 설정했다.
    전 국민 참여를 유도했으나 공무원이
    대량 동원되며 행정 공백 현상이 나타나는 등
    부작용이 적지 않았다.

  • 1,086

    범죄와의 전쟁 2년 동안 274개
    폭력조직을 색출하고 1,421명을 검거했으며
    1,086명을 구속했다.

  • 126

    역시 같은 기간 동안 경찰 2,200여
    명이 부상을 입고 126명이 순직했다.

수치 출처: <JTBC뉴스>, JTBC, 2015.10.13. / 김귀근·이귀원 기자, 「과거사위, 민간인 사찰 ‘청명계획’ 확인」, 연합뉴스, 2007.7.24.

  • 청명계획을 모티브로 한 영화 <모비딕>(2011) Ⓒ 쇼박스
  • 윤종빈 감독의 영화 <범죄와의 전쟁>(2012) Ⓒ 쇼박스
  • 범죄와의 전쟁을 다룬 1992년 10월 13일 자 <고바우 영감>.
    종결 이후에도 계속되는 강력범죄의 심각성을 다루었다.
  • 범죄와의 전쟁 선포

    혼란스러운 정국을 뚫고 노태우 정권은 13일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다. 선언의 주요 골자는 범죄와 폭력에 대한 전쟁 선포, 민주사회 기틀을 위협하는 불법행위와 무질서 추방, 일하는 사회 및 건전한 사회 확립 등이었다. 당시 치안본부는 1989년부터 5대 사회악 특별단속을 실행하고 있었는데, 대통령의 특별선언을 계기로 인력 및 장비를 보강하고 더 강도 높은 단속과 대처에 나섰다. 1992년까지 1만 6,000여 명의 경찰을 충원한 가운데 자정 이후 심야영업 단속, 유흥업소 단속, 교통질서 위반 집중 단속, 청소년보호구역 확대, 가정파괴범·유괴범·흉악범을 비롯한 각종 범죄조직에 대한 소탕 등 종합대책을 수립했다. 또한 보복범죄를 특정범죄가중처벌 대상에 추가하고 각종 형사관계법을 개정해 마약, 폭력조직, 인신매매, 가정파괴범에 대한 처벌을 강화했다.4) 효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특히 천여 명이 넘는 폭력조직 관련 인물을 검거하고 조직의 와해를 이끄는 성과를 거뒀다. 사람들은 폭력조직을 비롯한 강력범죄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국민적 관심사는 청명계획에서 범죄와의 전쟁으로 옮겨갔고, 신문 1면은 범죄와의 전쟁 관련 보도로 도배됐다.
    물론 사회 각계각층의 비판 여론이 만만치 않았다. 노태우 정권이 발표한 특별법은 대개 수사편의주의에 입각한 경우가 많아 국민 기본권 침해가 우려됐다.5) 억울한 피의자를 양산할 가능성도 제기됐는데 그 우려는 현실로 드러났다. 1991년 4월 26일 명지대 1학년이던 강경대 학생이 경찰 백골단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한 것. 훗날 ‘봄의 참극’이라 불린 사건이다.
    하지만 범죄와의 전쟁이 진행된 2년 동안 범죄율이 5.9%가량 감소했고, 긍정적인 여론 반응 덕분인지 훗날 부정적인 면모는 잘 드러나지 않았다. 적지 않은 이들이 노태우 정권의 큰 업적 중 하나로 손꼽지만, 1989년부터 폭력조직 검찰 수사가 진행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범죄와의 전쟁은 검찰의 수사 실적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정책이라는 일부의 평가도 있다. 노태우 정권은 청명계획에 대한 의혹을 매듭짓지 못했지만 사람들의 증오 본능을 일깨우며 분위기를 반전했다. 강력범죄라는 절대 악 앞에서 국민들은 하나가 되어 분노했다.

9ㆍ10월 이달의 근현대사

월별 주요 일정
날짜 내용
9

1945.9.2.

연합군 사령부,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분할 점령 발표

1901.9.7.

독일 작곡가 에케르트, 고종 황제 탄신일에 <대한제국 애국가>최초 연주

1948.9.9.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수립

1950.9.15.

인천상륙작전 개시

1969.9.15.

주택복권 최초 발행

1882.9.16.

일본에서 최초로 태극기 게양(박영효 수신사 일행)

1988.9.17.

제24회 서울 올림픽 개막

1991.9.18.

남북한 동시 UN 가입

1866.9.18.

병인양요

1978.9.26.

NHK-1 제9호 미사일 발사 실험

1920.9.28.

독립운동가 유관순 순국

10

1950.10.1.

한국군의 38선 돌파(국군의 날 제정)

1935.10.4.

국내 최초의 발성 영화 <춘향전>, 단성사에서 개봉

2007.10.11.

한강 수상 관광 콜택시 운항

1979.10.16.

부마민주항쟁

1948.10.19.

여수·순천 사건

1920.10.21.

청산리대첩

1994.10.21.

성수대교 붕괴

1949.10.23.

백범 김구, 암살범 안두희에 의해 피살

1909.10.26.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 저격

1979.10.26.

박정희 암살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