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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진실을 구술하다 현대사 공개구술 <녹두서점의 오월>

올해로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40년이 됐다. 5·18민주화운동 관련 기록이 201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고 이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었지만, 아직도 그 실상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 보인다. 이에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는 5·18민주화운동의 실상을 생생히 증언해주실 분들을 모시고 지난 8월 11일 화요일에 현대사 공개구술을 진행했다. 글 / 연구기획과 최상오 학예연구사

  • 진행을 맡은 임의진 관장
  • 구술자 김상윤 고문
  • 구술자 정현애 이사장
  • 구술자 김상집 이사장

5·18민주화운동을 겪은 이들의 공개구술

5·18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 새벽까지 열흘 동안, 광주시민과 전남도민이 전두환 전 대통령을 정점으로 한 당시 신군부 세력의 진압에 맞서 싸운 역사적인 사건이다. 적이 아닌 일반 시민을 상대로 마치 전쟁을 치르듯 진행됐던 진압은 당시 국내외 기자들에게 포착돼 커다란 충격을 안겼다. 그때의 민주화운동은 광주시민, 전남도민을 넘어 대한민국에 어떤 의미일까, 그리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까. 궁금증을 해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당사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그들의 말을 통해 진실에 근접해갈수록 우리는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지난 8월 11일 오후 2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6층 강의실에서 열린 5·18민주화운동 특별전 연계 현대사 공개구술 <녹두서점의 오월>은 그런 의미에서 중요한 자리였다. 광주 메이홀의 임의진 관장이 진행을 맡은 이날 공개구술에는 『녹두서점의 오월』(한겨레출판, 2019) 저자이자 5·18민주화운동과 관련이 깊은 김상윤 윤상원기념사업회 고문, 정현애 홍복학원 이사장, 김상집 광주전남 6월항쟁동지회 이사장 등 세 분이 구술자로 참여했다. 그들은 지금 각기 자리에서 일하고 있다. 하지만 1980년에 그들은 하나였다.

사람들과 함께 싸웠던 녹두서점

김상윤 고문은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던 5월 17일 밤늦게 예비 검속되는 바람에 당시 운동에 직접 참여하지는 못했으나, 1977년부터 녹두서점을 개업하여 민주화운동 세력의 활동 기반을 물심양면으로 제공한 인물이다. 당시 중학교 교사로 재직했던 정현애 이사장은 김상윤 고문의 아내로 그가 예비 검속된 이후 녹두서점을 지키며 활동가들과 함께 5·18민주화운동을 기획하고 그 참상을 알렸다. 1980년 5월 1일 군에서 제대한 김상집 이사장은 전남방직에서 근무하던 중 5·18민주화운동을 맞이했다. 그 역시 형수인 정현애 이사장과 함께 녹두서점을 지키며 광주에서 벌어진 참상을 외부에 적극적으로 알렸고, 향토예비군으로서 시민군에 참여해 전남도청에서 끝까지 항쟁했다.

당시 신군부 세력의 진압군이 집단 발포할 때 죽어가는 광주시민들을 목격한 녹두서점 일행은 검은 리본과 조기를 제작하여 시민들에게 보급했고, 이후 5월 23일부터 개최됐던 범시민궐기대회를 준비해 진행했다.

  • 5·18 특별전 연계 현대사 공개 구술녹두서점의 오월
    2020.8.11. 화요일 오후 2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6층 강의실
    구술자
    김상윤_ 윤상원기념사업회 고문
    정현애_ 홍복학원 이사장
    김상집_ 광주전남 6월항쟁동지회 이사장
    진행자
    임의진_ 메이홀 관장
    주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 이날 김상윤 고문과 정현애 이사장, 김상집 이사장의 공개구술은 녹두서점과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5·18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음을 다시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김상윤 고문의 공개구술에 따르면, 5·18민주화운동 전부터 녹두서점은 학생운동에 참여하고 있거나 시국 관련 정보를 필요로 했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이용하는 사랑방과 같았다.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이후에는 일종의 상황실이 되어 광주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진압군의 만행을 확인하고 이를 소식지(『투사회보』)로 제작하여 시내 도처에 알렸다. 또한 전남도청 앞 광장 등에서 벌어지고 있는 각종 시위를 기획하며 시민들과 함께 광주를 지켰다. 예를 들어 당시 신군부 세력의 진압군이 집단 발포할 때 죽어가는 광주시민들을 목격한 녹두서점 일행은 검은 리본과 조기를 제작하여 시민들에게 보급했고, 이후 5월 23일부터 개최됐던 범시민궐기대회를 준비해 진행했다. 광주시민들은 전면전으로 독재에 맞섰고 녹두서점과 그 일행들 역시 그들을 지원하며 함께 싸웠던 셈이다.
    이날 공개구술에서 참가자들은 특별히 윤상원 열사를 언급했다. 5·18민주화운동에서 빠트릴 수 없는 인물로 녹두서점에 참여했고, 계엄군에 맞서 싸우다가 5월 27일 총을 맞고 산화한 인물이다. 윤상원 열사는 서울의 직장(주택은행)을 다니다가 그만두고 광주로 내려와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광주 광천공단에서 한남플라스틱 노동자가 된 뒤 그는 호남권 최초의 노동자 야학인 들불야학에 적극 참여하며 학생들과 허물없이 지냈다. 인간적인 면모가 돋보였던 윤상원 열사는 5·18민주화운동 당시(5월 20일) 주변에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다. “아무래도 죽을 각오를 해야 할 것 같소. 우리라도 맞서 싸우지 않으면 신군부의 만행을 누가 얘기하겠습니까?” 공개구술을 통해 전해진 윤상원 열사의 인간미, 그리고 죽음 앞에서 의연했던 결기는 사라져도 사라지지 않는 깊은 잔상을 남겼다.

    공개구술로 전해진 그날의 진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은 당시 신문이나 TV 방송에서는 신군부 세력에 의해 왜곡된 채 전달되기 일쑤였다. “북한의 사주를 받은 일부 세력들이 선동하여 일어난 폭동”, “그리고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은 폭도”라는 보도가 이어졌고 뭇 사람들은 그 보도를 그대로 믿기도 했다. 왜곡된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아직도 어떤 이들은 5·18민주화운동이 북한과 짜고 벌어진 폭동이라고 힐난한다. 그러나 지난 8월 11일, 세 분의 공개구술을 통해 다시 한 번 깨달았다. 5·18민주화운동은 국가 폭력에 분노한 평범한 광주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졌다는 것, 그들이 지니고 있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모이고 모여 일어난 민주화운동이었다는 진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