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어떻게 목돈을 모았을까?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다고 믿고 싶지만, 인생에서 주는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하다못해 커피 한잔을 마시기 위해서라도 돈은 우리 생활에서 필수 불가결하다. 매일 쓰는 생필품을 사거나 커피 한잔 마실 돈이야 봉급으로 대부분 해결하지만, 한 달 봉급으로 어림없는 것들, 특히 자동차나 집 등을 구매하려면 봉급보다는 큰돈, 즉 목돈이 필요하다. 글 폴 카버 유튜버, 프리랜서 번역가
둘째가 올해 대학에 들어갔다. 이는 내게 막대한 자금 지출을 뜻하는 것이니, 특별전 <목돈의 꿈: 재테크로 본 한국현대사>에 큰 관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되는지 작은 팁이라도 얻을까 기대하는 마음이 제일 컸고, 입장료도 무료여서 일거양득이었다. 15년 동안 한국에서 일해왔지만, 금전 관련 마인드는 여전히 영국식일 때가 많은 듯해서 한국식 재테크를 좀 더 체득할 필요가 있기도 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목돈’이라는 말을 이번 전시를 통해 처음 들었다. 내 의식에는 목돈이라는 개념조차 없었으니 15년 이상을 일했어도, 내일 모래 50세를 바라보는 이 나이에 강남 아파트 하나 장만하지 못하고 이 꼬락서니로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일까.
전시를 둘러보면서 처음 눈에 들어왔던 것은 여러 형태의 금고들이다. 지금 같은 금융시스템이 정비되기 전이니 당연히 한국도 영국과 마찬가지로 돈을 집에 ‘저장’해야 했다. 영국에선 침대 매트리스 아래 혹은 소파 프레임 안쪽으로 돈을 숨겨놓거나 하는 일들이 있었는데 한국은 김칫독, 쌀을 보관하던 절미통, 총의 실탄을 보관하던 박스로 만든 금고 등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임시변통의 다양한 금고가 쓰였다. 돈이 남아서 저장해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야 몇 안 됐겠지만, 이런 식으로 목돈을 축적하던 건 그 시절엔 한국이나 영국이나 별반 차이가 없는 듯했다.
미래에 쓸 큰돈을 만들기 위해 금고에 현금을 저장하는 다소 원시적인 방법 외에 주식 투자 역시 두 나라 모두 친숙한 방법이다. 하지만 ‘계’라는 모임은 영국에서 절대 있을 수 없는 한국만의 고유한 투자 방법이다. 영국에서는 친구나 친척들에게 돈을 절대 꿔주지 말라는 철칙이 있다. 그래도 돈을 꿔줘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면 그냥 돈을 잃은 것으로 생각하라는 조언까지 있을 정도다. 물론 한국에서도 계 모임이 깨져 사기를 당하는 일이 있었다지만, 영국 사회는 학연·지연에 의해 인간관계가 형성되거나 유지되는 일이 그렇게 많지 않다. 누군가에게 큰돈을 맡겼다가 나중에 받을 차례가 되면 그 돈은 이미 바람과 함께 사라질 확률이 높다. 상황이 어찌 되었든 간에 한국의 개인들은 좀 더 끈끈한 신뢰를 바탕으로 계를 통해 부를 축적하는 것이 가능했다. 아마도 이러한 방법 덕에 한국이 다른 나라에 비해 좀 더 빨리 부유하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한국에만 존재하는 유일한 재테크 방식이 하나 더 있는데, 전세라는 개념이 그것이다. 영국에서는 임차 보증금이라고 해봤자 월세 두 달 치 정도가 전부라, 한국에 오는 영국 친구 대부분이 이 시스템을 생소하게 느낀다. 계와 마찬가지로 전세도 엄청나게 큰돈을 나중에 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임대인이라는 타인’에게 믿고 맡기는 방식이라 영국에서는 절대 가능하지 않은 시스템이다. 재밌는 것은 이 전세 시스템이 임차인과 임대인 모두에게 재테크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임대인은 임차인에게 전세금을 받아 적은 돈으로도 집 구매가 가능하고, 집값이 가파르게 뛰면 나중에 더 큰돈으로 팔 수 있다. 한때 ‘갭 투자’라는 단어까지 생겨난 것도 그 때문이다. 임차인 입장에서 보면 비싼 월세를 내지 않고도 집을 장기간 이용할 수 있는 방식이니까 이것도 재테크 수단으로 볼 수 있다. 집값이 떨어지는 요즘과 같은 시기엔 전세금을 반환하지 못하는 상황이 생겨나면서 전세 시스템이 한국에서 얼마나 더 오래 지속될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어찌 됐든 한국이나 영국이나 내 집 마련이라는 꿈은 똑같다. 영국은 한국보다는 내 집 마련이 조금 수월한 편이다. 집값의 10~15%를 지불하고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20~30년 동안 빚을 갚는 방식으로 집을 소유할 수 있다. 이는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한국은 영국보다 집값이 월등히 높아서 여전히 집값의 10%도 부족해서 많은 젊은이가 ‘엄빠은행’에 손을 벌려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한국 부모는 자식들의 대학 등록금, 결혼식 비용, 아들의 신혼집 마련, 딸의 신혼 가구 등을 대기 위해 목돈이 필요하다고 들었다. 영국의 부모들은 이런 책임에서 다소 자유로운데 자식이라 할지라도 대학 졸업 후 부모의 집에서 신세를 지면 자식들에게 월세를 받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한국에는 없지만, 영국에만 존재하는 재테크 수단이 있기는 하다. 프리미엄 채권(premium bonds)이 그것이다. 국채 투자는 이자가 적지만 안정적이라서 여러 나라에 흔히 사용되는 재테크 수단인데 영국의 프리미엄 채권은 국채이기는 하지만 이자를 매달 쿠폰으로 지불하는 여느 국채와는 달리 이자를 복권 당첨금처럼 소수의 사람에게 몰아주는 식이다. 어떤 사람은 100만 파운드를 이자로 챙기고, 누구는 10만 파운드를 챙긴다지만 대다수는 10파운드 정도를 이자로 받아 간다. 이 국채 형식의 복권에 당첨될 확률은 대단히 낮고 딱 한 번만 가능한 투자 방식이지만 영국에서는 조부모가 새로 태어난 손자 손녀들에게 프리미엄 채권을 선물로 주는 게 꽤 흔한 일이다. 마치 한국에서 돌 반지나 금덩이를 선물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전시에서 마지막으로 주목했던 점은, 한국 정부에서 저축을 권장하는 캠페인을 오래 펼쳤다는 점이다. 개인들의 저축은 인프라를 건설하는 등의 국책 사업에 사용됐고, 지금의 한국이 경제 강국으로 부상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이 저축 기조의 산업 발전이 항상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서 어떤 때는 개별 가정의 소비를 저축보다 권장하는 상황이 일어나기도 한다. 저축을 대하는 내 개인적인 소견도 조금 복잡하다. 불안한 미래를 위해 목돈을 마련할 필요를 느끼지만, 현재의 행복을 너무 많이 희생해가면서까지는 아니다. 자식들에게 유산을 남길 만큼의 많은 재산을 축적하지도 못했다. 국가도 경제 상황에 따라 긴축 혹은 확장재정 정책을 적절히 사용해야 하는데 나도 저축과 지출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이번 전시를 통해 한국의 재테크 방식을 볼 수 있어서 나에겐 매우 유용한 시간이었다. 물론 앞으로는 투자 방식에 대한 경계가 점점 허물어지면서 한국과 영국의 재테크 방식의 차이는 점차 줄어들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견해본다.
* 이 글의 내용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공식적인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폴 카버
연세대학교 국제학대학원을 졸업했고, 한국 생활 15년차 영국 출신 유튜버 및 프리랜서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2016년부터 2021년 1월까지 서울특별시청에서 외국인다문화담당관, 글로벌센터운영팀장으로 근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