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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동맹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전망

1882년 조선과 미국이 수교를 맺고 1954년 한미동맹이 발효된 이래 긴 시간 동안 한국과 미국은 복잡다단한 일들에 얽히고설켰다. 항상 좋을 수만은 없었으나 희로애락을 겪으며 두 나라의 관계는 더 견고해졌다. 지난 4월부터 문을 연 한미동맹 특별전은 그 기나긴 시간을 기억하고 되새기며 더욱 발전적인 미래를 도모하는 자리이다. 이를 기념하며 한미동맹의 과거와 현재를 내다보고, 미래를 전망하는 칼럼을 준비했다. (편집자 주) 손경호 군사사학자, 국방대학교 군사전략학과 교수

조선과 미국의 만남

조선과 미국의 첫 관계는 순탄하지 못했다. 조선이 외세의 접근을 경계하던 시기인 1866년 7월 미국의 상선인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던 가운데 분쟁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은 1871년 신미양요의 발단이 됐다. 미국 정부는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책임을 묻고 통상을 강요하기 위해 아시아함대를 조선에 보내 여러 차례 교섭을 요구했으나 조선은 쇄국을 기조로 한 대외정책에 따라 이를 거부했다.

결국 1871년 6월 10일부터 강화도에서 전투가 벌어져 조선의 수비대가 큰 피해를 봤다. 하지만 일본이 1879년 류큐 왕국을 강제로 합병하는 등 제국주의적인 본성을 드러내자 조선은 일본 견제 세력을 모색했고, 마침내 1882년 5월 22일 청나라 리홍장의 중재로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두 나라가 새로운 관계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으나 1905년 미국이 일본과 카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서로 필리핀과 조선에 대한 독점적 지위를 인정함으로써 미국은 일본의 조선 병탄을 방조했다.

  • 「한미상호방위조약」 비준서에 서명하는 한국 측
    변영태 외무장관 ©연합뉴스

6·25 전쟁과 「한미상호방위조약」

1945년 8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항복하자, 미군과 소련군은 한반도에 주둔하던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기 위해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각각 남쪽과 북쪽에 진주했다. 적절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키고자 했던 전쟁 기간의 합의와 달리 소련은 군정 기간 동안 조직적으로 북한에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하며 분단의 결정적인 계기를 조성했다. 결과적으로 한민족은 분단을 맞았고, 이는 6·25 전쟁이라는 전대미문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북한의 김일성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국토완정(북한에서 사회주의 체제로 한반도 전역을 통일하는 것을 가리키는 용어)을 주장하며 스탈린의 동의와 지원을 얻어냈다. 이로써 만 3년 1개월이 넘는 6·25 전쟁이 시작됐다.

  • 1953년 공보처에서 발행한
    「한미상호방위조약」 전문 ©대한민국역사박물관

6·25 전쟁은 한국과 미국의 관계가 동맹으로 거듭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미국은 전쟁 초기 공산주의의 침략을 좌시하다가 또 다른 세계대전이 발생할 것을 염려해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미국은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며 한반도 통일을 추구하기도 했지만, 중국군이 개입해 전세가 불리해지자 협상으로 전쟁을 종결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전쟁 2년 차인 1951년 7월부터 정전을 위한 협정이 진행됐다. 한국 정부는 큰 피해를 겪은 뒤에 전쟁 전과 비슷한 상황으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했으나 미국을 비롯한 참전국들이 전쟁을 그만두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결국, 한국 정부는 정전이 성립된 이후 다시 전쟁이 발생하지 않도록 미국의 한국 방위에 대한 확증을 얻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미국은 동맹을 통해 다시 분쟁에 연루되는 부담을 피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한국 정부가 반공포로를 석방하는 등 압력을 행사하자 한국 정부에 정전 동의를 얻기 위해 조약을 약속하는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1953년 10월 1일 정식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됐다.

  • 한미 친선의 상진 전단으로 1954년 7월 미국 워싱턴의
    만찬장에서
    이승만 대통령 내외와 아이젠하워 대통령 내외가
    함께하는 모습 ©대한민국역사박물관
  • 1954년 진행된 미국 원조 관련 행사 사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 1954년 진행된 미국 원조 관련 행사 사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한미동맹의 변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한반도의 정전체제를 보완해 실질적으로 한반도 안전을 보장하는 핵심적인 장치로 기능했다. 군사적인 분계선을 정하고 외국의 군사력 증강을 억제하는 정전협정만으로는 대한민국의 안보를 담보해줄 수 없었다. 정전협정이 체결된 직후부터 비무장지대의 군사적 도발은 별다른 견제 없이 발생했으며, 외국의 군사력 증강을 감시하기로 했던 중립국감독위원회 활동은 이른 시기부터 그 기능이 무력화됐다. 결국 북한 침략에 대한 한미 공동 대응을 약속한 한미동맹이 한반도 분쟁을 억제했고, 그동안 몇 차례 존재했던 위기를 관리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 1954년 발행한 대한민사원조처(KCAC) 홍보용 포스터.
    미국의 원조 관련 내용을 다뤘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1960년대 한미동맹은 한국 문제를 뛰어넘어 지역 차원의 안보 문제에 대응했다. 군사력을 통해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은 전쟁의 상흔을 극복하고 근대화를 달성하기 위해 미국과의 적극적인 협력을 모색했다. 당시 미국은 동남아시아에서 확산하는 공산주의를 봉쇄하기 위한 협력자가 절실히 필요했다. 두 나라의 필요가 조화를 이루며 한미동맹은 베트남전쟁에서 공산주의에 맞서는 자유 민주주의 연합의 중요한 축으로 기능했다. 이 과정에서 거듭된 미국의 안보공약과 한국군의 현대화 노력은 한반도에서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는 보호막이 됐다.

1970년대 이후 한미동맹은 세계적인 정세 변화에 따라 잇단 조정기를 거쳤다. 우선 미국이 베트남전쟁을 끝내고 국가 방위의 책임은 자국에 있다는 닉슨독트린(1969년)을 발표하자 한미동맹은 냉각기에 들어갔다. 전 세계적으로도 데탕트(긴장 완화)가 형성됐고 주한미군의 감축이 이루어졌다.

  • 6·25 전쟁 이후 미국에서 원조 물자로 보내준 공책

    ©대한민국역사박물관
  • 미국이 원조한 밀용 종이봉투
    ©대한민국역사박물관
  • 베트남전쟁 당시 파병 병사들의 물건을 담은 귀국상자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사실 한미동맹의 변화는 그 이전부터 시작됐다. 1968년 1월 21일 북한이 청와대를 습격했을때 한국 정부는 미국 정부에 과감한 대응을 요구했으나 반응은 소극적이었다. 북한의 미 해군함정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1968년 1월 23일)과는 반응이 달랐다. 이에 한국 정부는 미국 태도에서 동맹의 한계를 느껴 진지하게 자주국방의 길을 모색했다. 이후 1980년대 들어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면서 다시금 냉전이 격화하자 한미동맹은 이전의 견고함을 회복했다. 1990년대 들어 냉전이 갑작스럽게 종식되고 전통적인 위협 대신 테러리즘 등 새로운 위협이 등장하자 동맹은 재차 조정기에 들어갔다. 여기에는 중국의 성장 또한 영향을 미쳤다. 미국은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새로운 위협에 유연하게 대응하기 위해 해외 주요 전진기지에서 미군을 철수시키는 계획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주한미군의 추가적인 감축이 불가피했다. 아울러 주한 미군을 인계철선으로 활용해 한반도 유사시 미군의 개입을 확보한다는 발상에도 변화가 발생해 전방에 있던 미군 부대가 대규모 기지에 통합 주둔하게 됐다. 한편 북한이 핵 개발을 지속하면서 한미동맹은 북한의 핵 도발을 억제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됐다. 미국은 북한 핵 공격에 대비해 핵 확장을 억제하면서 북한의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을 저지하기 위한 경제 제재를 주도하고 있다.

  • 주한미군 제2사단 장병들의 이름이 수기된 태극기
    ©대한민국역사박물관
  • 베트남전쟁 당시 베트남독립동맹 병사들 대상으로
    제작된 전단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갈수록 성장하는 한미동맹의 전망

한미동맹이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고 발전을 지속하는 이유는 북한이라는 분명한 위협에 대한 대응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두 나라가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활용하는 다양한 기구와 협의체 역시 동맹의 결속을 위해 기능하고 있다. 양국의 군사력이 통합해 발휘되는 한미연합사령부가 대표적인 예이다. 이와 더불어 두 나라의 정상과 국방장관 사이에 정례 회의가 존재하며 다양한 수준의 실무 협의가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다. 때문에, 두 나라의 정부는 전시작전통제권 전환과 같이 복잡한 문제가 존재해도 동맹의 결속을 해치지 않고 각자의 국민을 설득하며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또한, 한국이 세계적인 이슈에 함께 대응할 수 있는 유용한 파트너로 성장한 것도 한미동맹이 계속 발전하는 이유가 될 수 있다.

이제 한미동맹은 미래 발전을 위한 여정에 들어섰다. 동맹은 꾸준하게 대응 이슈를 확장해왔으며 그 성격도 변했다. 2000년대에 들어 한국은 미국이 선언한 테러와의 전쟁에 함께했으며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가치 동맹으로의 변화를 모색했고,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는 핵심 축을 지향해왔다. 최근에는 한국에 적용되던 미사일 제한이 완전히 철폐돼, 보다 평등한 동맹으로 변화하고 있으며 반도체, 배터리, 바이오 분야로 협력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또한, 한미 양국은 북한의 핵 위협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핵협의그룹을 창설하기로 했고 양자컴퓨터, 사이버와 우주 분야에서의 협력을 약속했다. 글로벌 포괄적 전략동맹으로 선포된 한미동맹은 앞으로 세계적인 차원에서 북한의 위협은 물론 다양한 인류 공통의 문제를 다룰 수 있는 미래의 소중한 자산으로 발전할 것으로 기대된다.

* 이 글의 내용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공식적인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