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1일은 건전한 입양문화 정착을 위해 2006년 지정된 입양의 날이다.
입양의 날이 5월 11일로 제정된 데에는 가정의 달 5월과 한(1) 가정이 한(1) 명의 아동을 입양해 새로운(1+1) 가정을 만든다는 뜻이 담겨 있다.
현대적 의미의 입양은 국내에서 1953년부터 본격화돼 최근까지 해외로 입양된 아이들만 수십만 명에 이른다.
해외에서는 한국이 산업화된 해외 입양의 틀을 만들었다는 평가가 따르기도 한다.
전쟁이 만들어낸 비극 중 하나로 손꼽히는 해외 입양의 역사를 들여다본다.
조선 시대에도 입양과 비슷한 형태는 존재했다. 자식을 키울 수 없는 부모가 자식이 없다고 알려진 집 앞에 몰래 아기를 두었고, 그렇게 거두어진 아이는 ‘업둥이’라 불렸다. 대를 잇기 위해 양자를 들이는 경우도 있었다. 아이와 친생부모의 관계를 법적으로 정리하고 다른 부모에게 아이의 양육권을 넘겨주는 현대적 의미의 입양은 20세기에 등장했다.
국내에 해외 입양이 본격화된 시기는 6·25 전쟁이 휴전을 맺은 1953년으로 세계적으로도 해외 입양이 제도화되지 않았던 때다. 당시 한국에는 부모를 잃은 전쟁고아, 미군과 한국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들이 많았다. 한국 정부는 전쟁고아에게 좀 더 안정된 환경을 제공하고, 혼혈아들을 ‘아버지의 나라’로 돌려보낸다는 명목으로 해외 입양을 추진했다. 혈연 중심의 가족 관계와 유교적 도덕관도 한몫했다. 대개 한국인들은 자신의 핏줄이 아니면 키우기를 꺼렸다. 비혼모에 대한 시선은 따가웠다. 전쟁 이후의 척박한 환경과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결합하면서 해외 입양은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여겨졌다. 마침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은 동양의 아이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다음은 보스턴 칼리지 역사학과 부교수로 재직 중인 아리사 오(Arissa H. Oh)의 글 중 일부분이다.
한국의 고아들은 한국전쟁이 터진 순간부터 미국인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라이프>, <콜리어스>, <룩> 같은 대중잡지에 실린 사진과 기사들이 미국인의 동정심을 자극해서 기부금을 쏟아내게 했다. (중략) 사회복지사업은 “서양의 기독교인이나 백만장자들”의 소관이고, 가정이 무너져서 고아가 생기는 것 같은 사회 문제는 국가 정책으로 바로잡을 수 없다는 인식이 한국 정부와 국민에게 퍼져 있었다.1)
서양 국가들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한국의 아이들을 ‘구원’하길 원했고, 한국 정부는 그 아이들을 감당할 여력이 부족했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며 바야흐로 ‘어린이 디아스포라’의 시대가 막을 열었다. 1960년대 들어서는 해외 입양이 더욱 늘어났다. 1961년 9월 30일 「고아입양특례법」이 통과하면서 해외 입양에 대한 법률적 근거가 마련된 덕에 효율적이고도 빠른 진행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농업사회에서 근대 산업국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있던 시기의 한국은 넘치는 인구를 줄이려는 가족계획사업의 하나로, 미혼모나 극빈층 가정의 아이를 보내 복지 지출을 대폭 줄이는 데 해외 입양을 활용했다. 1953년 이래 최근까지 20만 명에 달하는 아이를 보낸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는 중국, 러시아, 과테말라에 이어 세계에서 네 번째로 많은 수치다.
성장과 발전을 위해 달리던 한국 사회는 경제가 안정적인 궤도에 오르면서 차츰 지난 문제들을 되짚기 시작했다. 복지라는 개념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1950년대에 시작한 해외 입양은 전쟁과 빈곤이 사라진 후에도 사라지지 않았고, 1970~80년대에는 전체 입양의 67%인 11만 2,500여 명을 해외로 보냈다.2) 1988년 미국 신문 『프로그레시브(Progressive)』에 따르면 당시 한국 어린이 한 명을 해외로 입양 보내면 5,000달러가 국내로 유입됐다. 그해 6,463명의 어린이를 입양 보냈으니 한국은 총 3,200만 달러를 벌어들인 셈이다. 이처럼 해외 입양이 돈벌이 수단으로도 활용되면서 ‘입양 산업’이라는 비판도 따랐다.
최근에도 연 300~500여 명의 아이들이 해외로 입양되고 있다.3) 보건복지부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간한 「헤이그국제아동입양협약 비준에 따른 입양지원 체계 개편 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2012~2016년 국내 4대 입양기관(홀트아동복지회, 대한사회복지회, 동방사회복지회, 성가정입양원)이 해외 입양을 통해 벌어들인 수익은 477억 원이 넘었다. 비혼모나 결손 가정의 아이가 주 대상이다. 그들에 대한 사회·경제적인 지원이 마땅치 않다 보니 대안으로 해외 입양이 선택되고 있다. 과거에 비해 그 수는 줄었다지만, 한국의 해외 입양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한국을 떠나야 했던 입양인들의 사연은 한국 사회가 지닌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어린 나이에 완전히 새로운 세계에 적응해야 했던 이들에게 ‘해외 입양’은 평생 풀어야 할 숙제다. 한 입양인은 “낯선 사람들이 끊임없이 ‘여기 온 지 얼마나 됐나’라는 질문을 할 때마다 나 자신을 미국인으로 생각하기는 어려웠다”고 말했다. 이는 어린 나이에 해외로 입양된 어린이들의 정체성 혼란과 방황이 어른이 돼서도 지속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뜻한다.
모든 어린이에게는 부모의 보호를 받으며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하지만 부모가 없거나 부모가 있더라도 더는 보호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다. 그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걱정이나 불안 없이 자라날 수 있는 환경이 아닐까. 어른들이 해야 할 것은 아이들을 위한 따뜻한 배경을 만들어주는 일이다. 입양의 날에 내포된 ‘건전한 입양문화’의 의미를 되새겨야 할 이유다.
5월 | 1일 |
조선어학회 기관지 『한글』 창간호 발행(19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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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
「대한 어린이 헌장」 제정 선포(19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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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
국내 최초 직접 선거인 5·10 총선거 실시(1948) 「근로기준법」 공포(19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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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
안창호의 민족운동단체 흥사단 창립(19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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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
박정희 주도의 5·16 군사정변(19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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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
5·18 민주화운동(19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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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
항일여성 운동단체 근우회 결성(19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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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
63빌딩 준공(19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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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일 |
대한민국 최초의 국회인 제헌국회 개회(19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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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 3일 |
한일 회담을 반대하는 6·3 항쟁(1964) |
6일 |
6·6 반민특위 습격(19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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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
연세대 학생 이한열, 시위 도중 최루탄 피격(19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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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
6·10 민주항쟁(19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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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
한국은행 설립(19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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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
6·25 전쟁(19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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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
백범 김구, 경교장에서 피살(19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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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
88올림픽고속도로 개통(19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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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
삼풍백화점 붕괴사고(19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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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
한국방송공사, 이산가족찾기 TV 방송 시작(198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