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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쳐다보아주시오!

현재의 우리에게는 익숙하지만, 어린이가 그 가치를 인정받은 것은 불과 100여 년 전 일이다.
방정환을 비롯한 소년운동가들이 어린이날을 만들고,
어린이의 인권을 위해 힘쓰지 않았다면 어린이에 대한 생각은 지금과 얼마나 달랐을까.
어린이를 내려보지 말고 반드시 쳐다보라던 그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편집자 주) 글 심용환 역사학자, 역사N교육연구소 소장

  • 소파 방정환(『부인 신여성 16~17』에서 발췌)
    © 소명출판(케이포북스)
  • 1923년 방정환이 주축이 돼 만들어진 어린이 잡지
    『어린이』 표지에 사용된 그림 및 사진들
    © 국립민속박물관

보살펴야 할 대상이었던
조선 시대의 어린이들

어린이는 결코 부모의 물건이 되려고 생겨 나오는 것도 아니고 어느 기성 사회의 주문품이 되려고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그네는 훌륭한 한 사람으로 태어 나오는 것이고 저는 저대로 독특한 사람이 되어갈 것입니다.

1923년 3월 소파 방정환(方定煥, 1899~1931)이 『어린이』 창간을 기념해 쓴 「소년의 지도에 관하여」의 한 대목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당연한 얘기처럼 느껴진다. 어린이는 그 자체로 독립적인 인격체이고 소중한 존재이며, 부모의 양육을 받지만 때가 되면 독립해서 자신만의 삶을 일구는 존재다. 그리고 부모와 교사, 사회는 그러한 어린이의 성장과 발전을 돕는다.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어른들을 찾아보기는 힘들 것 같다.

하지만 과거 우리 역사를 살펴보면 꼭 그렇지도 않았다.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학교에서는 짧은 두발을 강요한 데다 ‘사랑의 매’라는 이름의 지나친 체벌이 횡행했으니 말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쉽사리 윽박지르고 혼내고 출세를 강조하면서 자녀의 재능과 관심을 폄하하는 일도 빈번했다. ‘남자는 울면 안 돼’, ‘왜 옷을 그렇게 입고 다니니’ 등등 고정관념으로 인한 압박감도 거셌다. 이런 것들을 생각해보면 어린이를 대하는 태도를 두고 대한민국은 꽤 역동적인 변화를 거쳤다.

보통 ‘어린이’ 하면 방정환을 떠올린다. 어린이날 제정에 앞장섰고 어린이를 인격적으로 존중하며 존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니까 말이다. 이전까지는 ‘애녀석’, ‘어린애’, ‘아해놈’이라는 말로 어린이를 하대했다고 알려진다.

사실 ‘어린이’와 유사한 단어는 조선 시대 문헌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훈민정음언해본(訓民正音 諺解本)』에는 ‘어린 백성’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보통 ‘어리석은 백성’으로 이해한다. 17세기가 되면 ‘어린이’는 ‘어린 사람(小人)’으로 정착되니 생각보다 용어 사용이 오래됐다. 조선 후기 서양의 선교사들은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손주를 아끼는 모습을 두고 인상적인 기록을 많이 남겼다. 서양 사람들이 일찍부터 어린이들을 따로 재우는 등 독립적으로 키우려고 했던 반면, 우리나라에서 어린이는 조부모의 사랑과 보호를 받으며 자유롭게 노닐었기 때문이다. 당시 어린이들을 대하는 태도가 생각보다는 우호적이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어린이는 보살펴야 할 대상이자, 가족의 구성원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강했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이고 유교 문화가 강했기 때문이다.

  • 『어린이』의 창간호
    © 한국방정환재단

어린이가 ‘어린이’의
가치를 인정받기까지

하지만 구한말이 되면서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1876년 강화도조약이 맺어지고 고종이 적극적인 개화정책을 추진하면서 서구문물이 들어오고, 갑오개혁을 통해 근대적인 교육기관이 만들어지고, 독립협회 같은 다양한 구국 운동 단체가 만들어지면서 ‘소년운동’이 본격화됐다.

  • 『소년』
    © 국립한글박물관

당시 ‘소년’은 개혁적이고 변혁적인 인간상을 상징했다. 유교적이고 보수적인 낡은 이미지의 ‘노년’과 대비되는 용어였다. 1906년 『소년한반도』라는 잡지가 발행되고 특히 1908년 최남선이 주도한 『소년』이라는 잡지가 창간되면서 소년에 관한 관심은 점점 높아졌다. 하지만 1910년 조선이 일제에 의해 강제병합되면서 소년이라는 말은 위축된다. ‘젊은이(young man)’의 일본 번역어인 ‘청년’이라는 말이 자주 사용됐기 때문이다. 이 시기 청년은 20대를, 소년은 10대를 의미했다. 또한 당시에는 소년과 어린이에 대한 용어 구분이 거의 되지 않았으며, 문헌을 살펴봐도 두 개념을 혼동해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즉, 당시의 소년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어린이와 거의 일맥상통하게 사용됐다.

『어린이』의 주요 표지들 © 국립민속박물관

그리고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났다. 3·1 운동은 모든 면에서 거대한 충격을 준다. 일본의 무단 통치에 제동을 걸었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만들어지기도 했으며, 만주를 중심으로 무장투쟁이 한층 강성해지는 등 다방면의 변화를 이끌었다. ‘할 수 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민족의식의 대전환점이라고 보면 좋을 듯하다.

3·1 운동 이후 어린이에 대한 인식 또한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보다 구체적이고 강력한 움직임이 도모된 것이다. 이 무렵 방정환을 비롯해 김기전, 정성채, 정흥교, 조철호 등 뛰어난 소년운동가들이 등장했고 어린이에 대한 인권 의식도 함께 싹트기 시작했다. 천도교에서 발행한 『개벽』이라는 잡지에서는 이런 운동에 대한 다양한 생각이 표현되는데, 그중 사상가 이돈화의 주장이 중요하다.

  • 1921년 발행된 『개벽』 18호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미국의 아동학대폐지협회를 따라 아동보호기관을 설치 운영해야 한다.
영국의 소년의용단을 따라 소년지도기관을 창설하여 지력, 덕성, 체육 능력을 함양해야 한다.
빈아교육,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에 놓인 어린아이들을 돕고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자.

1921년 『개벽』 18호에 나온 이돈화의 글 중 일부분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어린이 사회복지, 어린이 교육, 사회취약계층 어린이에 대한 배려 등을 주장한 것이다. 당시로선 매우 파격적인 주장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사회가 이러한 방향으로 차곡차곡 발전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방정환은 「어린이 노래」라는 번역 동시를 발표하면서 ‘어린이’라는 용어를 본격적으로 사용했다. 또한 1923년 『어린이』라는 잡지를 창간했고 다른 소년운동가들과 함께 색동회를 조직해 본격적으로 소년운동을 이끈다. 『어린이』라는 잡지는 폐간과 복간을 거쳐 1949년까지 총 137호가 발간됐는데, 처음에 20명도 안 되는 구독자로 시작해 나중에는 10만 명에 가까운 이들이 읽는 등 큰 성과를 냈다.

가장 인상적인 활동은 어린이날 제정 운동이었다. 1923년 4월 17일 여러 단체가 연합회를 조직했고,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제정하기 위한 행사를 개최했다.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쳐다보아주시오!

당시 행사 선전지에 나온 내용으로 어린이에 대한 존중이 핵심 메시지다. 행사를 위해 20만 매의 선전지가 만들어 졌는데 이는 어린이날 행사를 홍보하고 많은 사람을 참석케 하려는 목적이었다. 선전지에는 어른에게 권고하는 내용과 어린이에게 권고하는 내용이 모두 담겨 있었다. 그리고 성황리에 열린 당일 행사에서는 「소년운동의 선언」이 발표됐다. 세계 최초로 만들어진 ‘어린이 인권 선언’이라 평가할 수 있을 정도로 그 내용이 구체적이고 선구적이었다.

어린이날 제정 운동은 해를 거듭하면서 발전했다. 다음 해인 1924년 2회 어린이날 행사는 5월 1일부터 4일까지 나흘간 진행됐다. 5월 1일에는 어린이 대회, 2일에는 어린이보호자대회 그리고 3,4일에는 부대행사를 진행했다. 더불어 어머니 대회, 아버지대회도 같이 열려 어린이 문제에 대해 보다 포괄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했다. 또한 평양, 인천, 개성, 광주, 진주 등의 지역에서도 동시에 행사가 진행됐다. 어린이날 행사는 1937년까지 15회에 걸쳐 진행됐고 1945년 해방이 된 후 다시금 추진해 오늘에 이르게 됐다.

  • 방정환과 색동회 회원들
    © 한국방정환재단

올해로 어린이날 100회,
우리에겐 무엇이 필요할까

생각보다 역동적인 역사 이야기 아닌가? 5월 5일은 단지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사주는 날이 아니다. 방정환을 비롯한 당시 소년운동가들은 민족의 위기 가운데 자주적인 주체성을 찾고자 했고, 특히 어린이가 가진 역량에 주목했다. 어린이들에 대한 인권 의식 또한 매우 구체적이었다. 어린이날 100회를 맞이하는 올해 우리에게는 어떤 문제 의식과 기대가 필요할까? 방정환이 애쓰던 그 시절에 비하면 많은 것이 바뀌었다. 이 토대 위에서 우리는 아이들에게 어떤 비전을 제시할 수 있을까. 우리의 아이들은 어떻게 보다 나은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을까. 지혜와 마음을 함께 모으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1923년 어린이날 기념 선전문

  •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쳐다보아주시오.

  • 어린이를 늘 가까이 하사 자주 이야기를 하여 주시오.

  • 어린이에게 경어를 쓰시되 늘 보드랍게 하여 주시오.

  • 이발이나 목욕, 의복 같은 것을 때맞춰서 하도록 하여 주시오.

  • 잠자는 것과 운동하는 것을 충분히 하게 하여 주시오.

  • 산보와 원족 가튼 것을 가끔 가끔 시켜주시오.

  • 어린이를 책망하실 때에는 쉽게 성만 내지 마시고 자세히 타일러주시오.

  • 어린이들이 서로 모여 즐겁게 놀 만한 놀이터나 기관 같은 것을 지어주시오.

  • 대우주의 뇌신경의 말초는 늙은이에게 있지 아니하고 젊은이에게도 있지 아니하고 오직 어린이들에게만 있는 것을 늘 생각하여 주시오.

  • 돋는 해와 지는 해를 반드시 보기로 합시다.

  • 어른에게는 물론이고 당신들끼리도 서로 존대하기로 합시다.

  • 뒷간이나 담벽에 글씨를 쓰거나 그림 같은 것을 그리지 말기로 합시다.

  • 길가에서 떼를 지어 놀거나 유리 같은 것을 버리지 말기로 합시다.

  • 꽃이나 풀을 꺾지 말고 동물을 사랑하기로 합시다.

  • 전차나 기차에서는 어른에게 자리를 사양하기로 합시다.

  • 입은 꼭 다물고 몸은 바르게 가지기로 합시다.

※ 출처: 한국방정환재단 누리집(children365.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