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공감 초대석

‘내 일’이
‘내일’이 될 때

김수진 자료관리과 학예연구관

지난 1월 문을 연 상설기증관의 첫 전시 제목은 <내 일로 내일을 꿈꾸다>
‘내 일’로 치열하게 ‘내일’을 꿈꾸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관람객을 기다린다.
생각해보면 우리 역시 다를 바 없다. 지금 쌓아 올리는 희로애락이 곧 우리의 내일을 만들어주니까.
이 전시를 기획한 인물은 5층 역사관 개편에 열정을 쏟았던 김수진 학예연구관이다.
그 역시 박물관에서 자신의 일로 내일을 꿈꾸고 있다. 사진 이대원 싸우나스튜디오

기증, 함께 만드는 역사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관이 있긴 하지만 흔한 사례는 아닌 듯합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상설기증관을 건립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2012년 12월 26일 개관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2010년부터 자료를 수집했어요. 기증도 그때부터 받아서 작년까지 7만 5,000여 점의 기증품이 모였죠. 박물관 소장자료가 15만여 점이니까 50퍼센트에 달할 정도로 기증품 비중이 커요. 기존 기증자들에 대한 예우를 갖추고, 새로운 기증을 활성화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지요. 때문에 2013년과 2017년에는 기증특별전을 열었고, 온라인 기증관을 여는 등 다양한 방식을 시도했어요.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하다고 느껴 논의 끝에 3층에 상설기증관을 마련하게 됐습니다. 지난 10년의 숙원사업이 결실을 본 것이죠.

<내 일로 내일을 꿈꾸다>라는 첫 전시 제목이 흥미롭습니다.
‘1960~80년대 일과 직업’을 주제로 했다죠. 이런 주제를 설정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자료관리과에는 작년 8월에 왔습니다. 상설기증관 전시 준비는 이보성 학예연구사가 이미 담당자로서 진행하고 있었지요. 초기에는 30가지 정도의 직업 범주를 바탕으로 기증품을 조사하면서 학창 시절, 학교 주제 전시를 생각했다고 하더군요. 제가 합류하고 난 뒤 좀 더 폭넓은 주제로 방향을 바꾼 거예요. 비교적 좁은 전시장 규모에 맞춰 주제를 선정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1960~80년대 일과 직업’으로 모였어요. 기증한 분들이 대개 어르신인데, 자신의 경험 중 가장 빛났던 시절의 물건을 기증하는 경우가 많아요. 가장 활발하게 일했고 성과가 있었던 시절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거죠. 그분들이 빛났던 시기가 1960~80년대였던 거예요. 그리고 직업이 아니라 ‘일과 직업’이라는 게 중요한데, 전시된 기증품을 보면 미국평화봉사단 참여 관련 기증품도 있고 취미생활 관련 기증품도 있어요. 임금을 받고 활동한 직업은 아니더라도, 본인의 열정을 투여해 활동한 성과까지 모두 일의 범주에 넣어 전시하고 있어요. 그 모든 일이 결국 우리의 ‘내일’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니까요.

지난 1월 문을 연 상설기증관의 첫 전시 <내 일로 내일을 꿈꾸다>에서는 ‘1960~80년대 일과 직업’을 주제로
30여 명 기증자의 139건 203점의 기증자료를 선별해 전시하고 있다.

7만여 점이 넘는 기증품 중 139건 203점을 선별해 전시한다고 하죠.
선별 기준은 무엇이었나요?

전후 복구를 거쳐 고도성장기로 진입했던 1960~80년대를 잘 보여주는 기증품을 선별했습니다. 예를 들어 택시 기사, 역무원, 의류업 종사자 등과 관련된 기증품들이 있는데, 이 직업들이 지금은 평범해 보여도 당시에는 최첨단 산업을 다루는 일이었어요. 미래를 선도하는 직업에 종사했던 분들의 젊음과 열정, 자부심이 기증품에 담겨 있는 셈이죠. 다만 농업 분야의 기증품이 없다는 게 아쉽습니다. 농업은 우리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왔는데 말이에요. 우리가 농업 분야의 자료를 직접 발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물관 입장에서 기증은 어떤 의미일까요?

이번 전시의 캐치프레이즈가 ‘기증, 함께 만드는 역사’입니다. 기증품은 개인과 사회의 만남이 응축된 물건이에요. 개인의 이야기가 사회와 어떻게 만나는지 보여주죠. 이러한 기증품을 통해 평범한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온 역사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기존 언론이나 학계에서 미처 주목하지 못한 것들을 기증품이 잘 보여주는 경우도 많습니다. 덕분에 우리 역사는 더 풍부해질 수 있어요. 기증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또한 ‘현대사 박물관’이라는 점에서도 기증은 중요해요. 지금 벌어지는 일은 미래 세대의 과거가 되잖아요? 때문에 현대사 박물관은 ‘현재’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현재를 기록하려면 지금 살아계신 분들의 참여가 절대적으로 필요해요. 관람객분들이 이번 전시를 통해 “내 경험 중에 후대에 남길 만한 것은 무엇일까”라고 고민하며 기증을 실천해주시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학예연구직은
끊임없이 배우고 대화하며 열려 있어야

학예연구관이란 직함은 우아하게 느껴지지만, 많은 공부와 고민이 필요한 전문직이겠죠.
이곳에서는 언제부터 일하셨고,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사회사, 여성사, 문화이론 등을 공부했는데, 식민지 시대의 사진이나 시각 이미지를 분석하고 데이터베이스를 다루는 일이 제 연구 분야 중 하나였어요.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근무할 때는 작은 전시를 기획해보면서 박물관 업무에 흥미를 느꼈죠. 그러던 차에 2014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 공채를 통해 들어왔고 2015년 9월에는 학예연구관이 됐습니다. 학예연구사가 담당 업무를 맡는다면, 학예연구관은 학예연구사 선생님들이 진행하는 업무가 잘 진행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동시에, 업무 개선이나 새로운 업무 개발을 계획합니다. 그 밖에 예산을 확보하기 위한 근거자료를 만들고, 업무 현황 보고를 만드는 일도 맡습니다.

학예연구직에 근무하려면 어떤 역량과 노력이 필요한가요?

큐레이팅의 핵심은 에디팅(editing, 편집)과 협업이에요. 예를 들어 상설기증관 첫 전시 주제가 ‘1960~80년대 일과 직업’인데 이건 제 전문 분야가 아니에요. 또한 전시 공간을 기획하고 디자인하는 일, 조명을 설치하는 일 등도 제 전문 분야가 아니지만 전시를 기획하고 준비하는 학예연구직이라면 다룰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학예연구직에게는 어떤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할지, 어떤 내용을 취사선택할지 등의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그게 바로 편집 능력이에요. 학예연구직에 있는 사람들은 한곳에만 머물면 안 돼요. 자신의 전공 분야를 넘어서 계속 배우는 자세,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과 열린 마음으로 대화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지난 1월 문을 연 상설기증관의 첫 전시 <내 일로 내일을 꿈꾸다>

2020년에 문을 연 역사관의 전면 개편을 담당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개편을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2018년부터 상설전시 전면 개편이 시작됐는데, 저는 역사관 개편을 총괄하며 참여했습니다. 우리 박물관은 국내 유일의 일반 현대사 박물관이에요. 우리 현대사가 이념적 갈등과 대립이 큰 만큼, 논란을 피해갈 수 없는 게 우리 박물관의 숙명이죠. 논란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게 기존의 상설전시가 국가 중심의 발전사관으로 지나치게 지식 전달 중심이라는 비판이었습니다. 개관 10주년을 맞이하면서 그런 이야기들을 반영해 개편한 것이죠.

최근 박물관들의 상설전시
개편 주기가 빨라지고 있다죠?

현대사는 특히 연구가 많이 되기도 하고, 시대에 따라 동일 사건에 대한 해석이 달라질 수 있거든요. 금방 낡아지는 느낌이 들죠. 더불어 최근에는 디지털 기기를 활용한 전시가 많은데, 이 기기들의 교체 주기는 더 빨라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HD급 기기면 충분했는데 이제는 UHD 4K급이 필요해요. 그리고 디지털 기기를 바꾸면 콘텐츠도 그에 걸맞게 바꿔야 해요. 하드웨어와 콘텐츠의 합이 중요하죠.

평범한 사람들의
기억과 경험을 담은 ‘그 무언가’

자료를 발굴하고 관리할 때 어떤 기준과
철칙을 갖고 업무에 임하는지 궁금합니다.

자료를 발굴할 때는 일차적으로 역사적 사건과의 관련성 여부를 살펴봅니다. 정치사에만 치우치지 않고 사회사·문화사 측면에서 중요한 자료들도 함께 발굴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기존 학계에서 조명되지 않거나 연구가 되지 않은 자료들도 주목합니다. 예를 들어 가계부, 토지 매매 문서, 일기 같은 자료는 학계에서 연구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길어 올려야 하는 현대사 박물관에는 꼭 필요한 자료들이죠. 자료를 직접 생산해내는 것도 중요해요. 현대사 박물관은 당대성을 다루기 때문에, 현재를 기록하고 남겨놓아야 할 의무가 있거든요. 그리고 자료 관리 측면에서 우리가 중요히 여기는 것은 ‘개방성’입니다. 박물관 자료는 누구나 접근해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 박물관 누리집에 마련된 ‘근현대사 아카이브’에 접속하면 누구든 자료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앞으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해보고 싶은 게 있나요?

현대사 박물관의 패러다임은 전통적인 박물관과는 다릅니다. 우리 박물관에는 고려청자나 반가사유상 같은 식의 ‘보물’이 없어요. 대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기억과 경험을 담은 ‘그 무언가’예요. 당대성을 지닌 자료들이죠. 그러니 이곳에서는 자료의 개념을 재정립해야 해요. 제 꿈은 이렇게 평범한 사람들의 기억과 경험을 후대의 사람들에게 유산으로 전해줄 수 있도록, 새로운 형식의 자료 수집 방식을 만드는 겁니다. 영국의 임페리얼전쟁박물관(Imperial War Museums)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을 경험한 가족의 이야기를 사진 한 장이든, 편지 하나든 간단하게 홈페이지에서 접수해 수집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어요. 작년에 벌써 1만 명 이상이 참여했더군요. 정말 너무 멋진 프로젝트 아닌가요? 정비하고 준비할 일이 많지만, 꼭 해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