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역사 만나기

아침과 그늘 사이에서:
광화문의 단상들

20대 중반의 어느 일요일, 나는 광화문 네거리의 동아일보사 4층 편집국에서 입사시험을 치렀다.
그때 실기시험 문제가 기억난다. “광화문 네거리로 나가 한 시간 동안 취재한 뒤 이를 스케치 기사로 작성하시오.”
창밖을 내다보았다. 일요일 낮의 텅 빈 광화문 네거리가 어찌나 황량하던지…. 난감했다.
‘도대체 어디 가서 무엇을 살펴보아야 하나?’ 글 김창희 언론인, 『오래된 서울』저자

내 생활의 근거지였던 광화문 일대

# 입사시험을 주관하던 사회부장께서 한마디 보탰다. “단, 광화문 네거리와 4·19를 연결시키는 내용은 쓰지 마십시오. 그건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이니 뉴스가 되지 않습니다.” 더 난감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쓸 소재가 마땅치 않은 마당에 쓰지 말라는 제한까지 덧붙이다니….
그 시험에 합격한 걸 보면 얼기설기 글을 쓰긴 썼던 모양인데, 무엇을 어떻게 썼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날의 문제만은 또렷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다. 또 한 가지 깨달음! 누구나 아는 사실, 즉 뉴(New)하지 않은 사실은 뉴스(News)가 되지 않는다는 것!
말하고 보니 쑥쓰럽다. 그건 너무 당연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순진하던 세월이었다. 그 순진함에 열정이 덧붙어 20여 년(1983~2005년) 동안 세종로 139번지 동아일보사를 중심으로 대략 반경 1km 안쪽의 영역에서 밥 먹고, 술 마시고, 대화하고, 놀고, 데이트하고… 일상사의 상당 부분을 영위했다. 광화문 일대는 나의 생활 근거지였다.

# 큰길은 그런 생활의 영역이 아니다. 일상생활은 골목과 그 골목 안의 각종 집에서 이루어진다. 그 무수히 많던 밥집과 술집들! 그중 하나가 청진동의 ‘영(影)’이었다. 그 비좁은 집에서 우리의 비좁은 동료애와 우정도 꽤나 여물어갔다. 낙타가 사막에서 마른 목을 축이듯 오아시스 같은 곳이기도 했고, 노조를 만들기 위한 모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그곳은 우리의 아지트이자 둥지였다.
왜 ‘그림자 영(影)’ 자를 옥호로 내걸었는지는 미처 알아보지 못했다. 이제는 물어볼 길도 없다. 청진동 재개발 사업이 본격화되면서 그 여주인이 세입자 권리 투쟁의 전사로 나서더니 그게 화근이 되어 결국 세상을 버렸다.

  • ‘광화문 광장’은 10년 이상 논란 중이다.
    최근 또 다시 공사 가림막이 설치되기 전 광화문 광장의 모습이다.

광화문 키드의 ‘버라이어티했던’ 하교길

지금은 사라진 청진동 인근의 피맛골 풍경 Ⓒ 한울문화재연구원

# 조선시대부터 육조(六曹)거리의 양쪽 뒤편, 즉 동쪽의 청진동과 서쪽의 당주동은 ‘육조의 그늘’이었다. 본래 그림자 영역이었다는 말이다. 관청으로 따지자면 실무 행정의 외청들이 밀집한 곳이요, 종로의 시전거리에서 보자면 온갖 내밀한 거래가 오가는 현장이었다. 역사는 이렇게 골목길에서 이루어지는 법인가 보다.
그런 당주동 영역에 2000년대 들어 ‘경희궁의 아침’이라는 큰 오피스텔과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것은 참으로 역설적인 일이었다. 언젠가 경희궁을 복원한다면서 궁궐 영역을 둘러싸고 그런 고층 건물들을 허가하는 정부의 조치는 과연 앞뒤가 맞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당주동 골목길의 그 정연하고 튼실한 한옥들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인위적인 아침이 자연스런 그늘을 내쫓았다고 해야 할지….

# 없어진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시계를 더 앞으로 돌린다. 사실 나는 1970년대 중반 고등학교 시절부터 ‘광화문 키드’였다. 지금 정독도서관 터의 경기고등학교로 등하교를 하던 길들이 삼삼했다.
하교길이 특히 다양했다. 하나는 신민당사 옆으로 육교를 건넌 뒤 인사동을 거쳐 종로까지 나와서 귀가 버스를 타는 길이었다. 책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인사동 고물상(골동품상의 영업허가가 ‘고물상’이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까?)들 앞에 산더미 같이 쌓아놓은 옛 물건들을 기웃거리는 일이 어찌나 마음을 푸근하게 하던지! 그러다 보면 뒤에서 택시의 경적과 함께 벽력처럼 들리는 소리! “야, 이 ××야, 비켜!” 뭐가 그리도 바빴던 것일까?
또 하나의 하교길은 광화문의 대로로 나가는 길이었다. 삼청동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사간동에서 길을 건너 당시 중앙청의 돌기둥 담장을 끼고 정부종합청사 쪽으로 간 뒤 신문로 근처에서 역시 버스를 탈 수 있었다.
당시 오후 시간대의 신문로와 종로는 요즘 말로 ‘고딩들의 천국’이었다. 서울의 중심부가 고등학생들로 채워지곤 했다는 것이 지금 상상이 될까? 그 각양각색의 교복들이 이루는 물결! 교복이라고 다 같은 게 아니었다. 색깔과 모양새가 모두 달랐다. 여고생 교복의 맵시로는 단연 이화여자고등학교였다고 기억된다.

‘대로’에서 ‘광장’으로 간 광화문, 시민 품에 안길까?

# 중·고등학교의 도심지 밖 이전 정책에 따라 이제 그런 물결도 과거지사가 되고 말았다. 가뜩이나 행정중심지로서 옷깃을 여미고 다니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던 광화문과 그 인근 거리가 더욱 무미건조해졌다.
그러더니 최근 10여 년간 광화문을 둘러싼 최고의 화두는 단연 ‘광장’이다. 사실 전근대 시기의 광화문 거리는 국가 또는 수도의 중심가이기는 했으되 광장은 아니었다. 우리에겐 그런 광장이 없었다. 굳이 역사적 연원을 찾자면 1960년 4·19 혁명을 소환할 수 있겠다. 거기서부터 1987년 6·10 민주항쟁, 2002년 월드컵을 거쳐 최근 촛불혁명까지 아주 가끔씩만 시민이 이 거리의 주인이 됐다. 그런데 이제 이 거리를 사실상 광장으로 만들고, 그것을 시민들에게 돌려준다고 하더니, 그것도 최근 서울시장 보궐선거 이후 다시 방향이 흔들리고 있다. ‘광화문 광장’은 뉴스인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