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실명제 실시 현황 파악을 위해 금융기관을 방문한
김영삼 대통령 Ⓒ 국가기록원
역사 속 오늘

시스템을 뒤흔든
금융제도의 탄생

대통령 긴급재정경제명령
제16호 금융실명제

“이 시간 이후 모든 금융거래는 실명으로만 이루어집니다.” 1993년 8월 12일 저녁 7시 45분,
김영삼 대통령은 긴급 담화문을 통해 긴급재정경제명령 제16호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긴급재정경제명령」을 선포했다.
‘긴급’이라는 수식어에서 느껴지듯 비밀스럽고 갑작스러운 발표였다.
이는 민주화 시대 이후 최초의 긴급명령으로 우리나라 금융거래 시스템의 근간이 되는
중요한 제도로 평가받는다.

  • 8월 12일 긴급 담화문을 발표하는 모습 Ⓒ 국가기록원

부정부패와 불신이 쏘아 올린 금융실명제

1961년 7월 29일 무기명·가명 금융거래의 비밀을 보장하는 「예금·적금 등의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다. 1960년대 고도성장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투자 재원의 원활한 조달이 필요했던 당시 정부가 예금을 늘리려는 목적에서 시행한 정책이었다. 익명이나 차명으로 금융거래를 할 수 있었기에 예금이 증가하는 효과가 있었던 반면 세금을 정확하게 추징할 수 없었고, 이는 지하경제를 양성화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탈세의 방편이 되는가 하면, 부정부패의 수단이 되기도 했다. 1982년 ‘건국 이래 최대 규모 금융사기’라 불린 장영자·이철희의 어음 사기 사건은 금융실명제 도입을 부추기는 꼴이 됐다. 장영자·이철희는 무기명·가명을 허용하는 당시 제도의 허점을 이용해 변칙적인 자금을 조성하거나 대출했고, 이는 수천억 원의 피해를 낳았다.

금융거래에 대한 불신이 확산되자 당시 정부는 지하경제의 소지를 없애고 금융 풍토를 쇄신하고자 금융실명제를 추진했다. 최초 1982년 전두환 정부가 「금융실명제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지만 전면 시행은 보류됐다. 당시 우리나라는 제2의 오일쇼크 여파로 경제성장률이 하락했고 경상수지는 적자였다. 자금 해외 유출과 금융권 자금 이탈, 기업의 자금 조달 곤란 등 각종의 부작용이 우려되면서 금융실명제 실시는 미루어졌다. 1988년 노태우 정부 때도 시도했으나 경제위기론이 제기되며 유보를 피할 수 없었다.

  • 1993년 9월 경제기획원과 재무부, 공보처에서 발행한 금융실명제 정책 홍보 책자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긴급하고 비밀스럽게 진행한 금융 개혁

두 차례 좌절을 겪으며 지지부진하던 흐름을 잰걸음으로 깨뜨린 때가 1993년이다. 1993년 2월부터 집권한 문민정부는 김영삼 대통령이 대선 공약으로 줄곧 내세운 금융실명제를 실시하기 위해 긴급하면서도 비밀스러운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금융실명제를 추진하려는 목적은 분명했다. 금융거래의 투명화를 통해 부정부패와 정경유착을 척결하고, 분배정의를 실현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국회에서 법 개정을 통해 실시할 경우, 논의 과정이 외부에 알려지면 대규모 자금이 해외로 이탈해 경제 위기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었다. 당시 정부는 특별팀을 조직해 비밀리에 임대한 건물에서 철저한 보안 속에 제도를 마련했다. 특별팀의 진행 상황은 오로지 대통령과 부총리, 재무부 장관 등 ‘직통 보고 라인’만 확인할 수 있었다. 특별팀 실무진은 건물을 드나들 때 신분 노출을 피하고자 변장을 하고, 가짜 해외 출장을 떠난 척하는 등 보안 유지를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 과정을 거쳐 1993년 8월 12일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긴급재정경제명령」(일명 금융실명제)이 긴급 발표됐다. 정부는 비실명 계좌의 실명 확인이 없는 거래를 금지하고, 순 인출이 3,000만 원 이상일 경우 국세청에 통보해 자금 출처를 조사받도록 함으로써 부정한 금융거래를 막고자 했다. 또한 철저한 실명 확인을 하되 당사자의 요구나 동의 없이는 금융 정보를 타인에게 제공할 수 없도록 비밀 보장을 강화했다. 당시 정부는 당일 저녁 8시 이후부터 위 사항을 실시하고 다음 날은 오후 2시부터 금융기관의 업무를 시작한다고 발표했다.

  • 금융실명제 발표 직후 혼란스러운 상황을 묘사한 고 김성환 화백의 「고바우영감」
    (『문화일보』 1993년 8월 13일 게재)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요즘은 금융 거래 시 신분 확인이 기본이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무척 낯선 풍경이었다. 어린이가 혼자 돼지저금통을 들고 은행에 가도 아무 조건 없이 계좌를 개설해주던 시절이다. 금융실명제 발표에 놀란 시민들은 다음 날 은행으로 몰려들었다. 금융 질서를 하루아침에 바꾼 개혁이었던 만큼 파장은 컸고, 외신도 긴급 타전하며 놀라움을 전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협조한 덕분에 우려와는 달리 혼란은 길지 않았다. 그해 실명전환 의무기간(8월 13일~10월 12일) 동안 가명계좌의 실명 전환율은 97.4%에 달했고, 실명으로 전환된 가명과 차명 예금액은 모두 6조 2,379억 원이었다. 금융실명제는 금융 거래와 과세 기반의 투명성을 확보하면서 금융산업 발전에 이바지했다. 세원(稅源)이 양성화되면서 조세 형평성에 이바지했고, 지하경제가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정경유착 등으로 생기는 부정부패의 실체가 드러났다. 특히 고위급 인사들의 정치자금 비리가 세상에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물론 금융실명제가 모두를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1997년에는 장기채권과 외평채를 무기명으로 발행하도록 예외를 두는 보완 조치를 시행하며 비판을 받았다. 법의 틈새를 노리는 대포통장과 차명 계좌 등의 비리는 여전히 문제가 되고 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는 공평한 과세의 기틀을 마련했고, 정치자금의 투명화, 공직자 재산 공개를 가능케 하는 등 우리 경제 정의와 투명성 확보에 이바지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달의 근현대사

월별 주요 일정
7

1

제헌국회,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결정(1948)

부동산실명제 실시(1995)

2

서재필을 중심으로 독립협회 결성(1896)

4

남북한, 7·4 남북 공동 성명 발표(1972)

7

노태우 대통령의 7·7 선언(1988)

8

북한 김일성 주석 사망(1994)

14

공보부, 농어촌에 라디오 보내기 운동 전개(1962)

15

문교부, 중학교 무시험제도 발표(추첨제)(1968)

17

제헌 헌법 공포(1948)

27

6·25 전쟁, 정전협정 체결(1953)

31

국회, 국군 베트남 파견 동의(1964)

8

9

손기정, 제11회 베를린올림픽에서 마라톤 우승(1936)

11

국내 최초 과학위성 ‘우리별 1호’ 발사 성공(1992)

15

일본 제국에 주권을 되찾고 광복을 맞다(1945)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1948)

18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도끼 만행 사건 발생(1976)

21

『상해독립신문』 창간(1919)

22

한일병합조약 조인(1910)

23

IMF 관리체제에서 공식 졸업(2001)

24

한국과 중국, 국교 수립(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