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층 로비에 마련된 한미수교 140주년 기념
작은 전시 <조미수교와 태극기>의 전시장 풍경
전시 속으로

한미수교

140주년의 의미

한미수교 140주년 기념
작은 전시 <조미수교와 태극기>에 덧붙여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올해부터 1층(로비)에 작은 전시실을 마련했다.
첫 번째 전시에서는 삼일절 103주년을 맞아 상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발행한 『독립신문』 가운데
국내외에서 유일하게 대한민국역사박물관만 소장하고 있는 5개 호를 소개했다.
지난 5월 13일부터는 두 번째 전시로 한미수교 140주년을 기념해 조미수호통상조약(1882.5.22. 체결) 당시 고안된
최초의 태극기(도안) 2점을 공개하는 <조미수교와 태극기>가 문을 열었다.
이번 호에는 주요 전시품인 최초의 태극기(도안)와 그 제작 배경이 된 조미수교 체결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칼럼을 마련했다.(편집자 주) 글 이태진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명예교수

  • 슈펠트 제독
    (출처: http://famousamericans.net/robertwilsonshufeldt/)

1882년,
조선과 미국이 수교를 이루기까지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은 미국 측 대표 로버트 윌슨 슈펠트(Robert Wilson Shufeldt, 1822~1895) 제독의 끈질긴 노력 끝에 이루어졌다. 그는 1866년 7월의 제너럴셔먼호 침몰 소식을 듣고 이듬해 진상을 알기 위해 워추세트호를 타고 조선으로 오려고 했다. 그러나 겨울 악천후로 회항하고 말았다. 그 후 1878년부터 세계 일주 순항 임무를 맡은 그는 티콘데라고호를 몰고 일본 나가사키에 가서 조선과 수교를 맺고자 통로를 찾았다.

1880년 봄, 슈펠트는 우선 일본 외무성에 도움을 청했으나 회피하는 기색을 보이자 그해 5월 직접 부산항으로 가서 부산 주재 일본 영사를 통해 미국 대통령의 친서를 조선 정부에 전했다. 이번에는 조선 측에서 일본을 통한 교섭에 응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실의에 차서 나가사키로 돌아갔다. 다행히 나가사키 주재 청국 영사(餘瓗)가 자국의 이훙장(李鴻章) 북양대신이 중개할 의사가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해양국가의 깃발』에 실린 태극기 도안

슈펠트는 그해 9월 본국으로 돌아가 세계 순항 임무를 종료했다. 슈펠트가 미국으로 떠난 직후 10월 조선 국왕은 미국과의 수교를 바란다는 요지의 국서를 나가사키 청국 영사(何如璋)에게 전했다. 이 의사가 이훙장과 슈펠트에게 어떻게 전해졌는지는 현재 알 수가 없다. 이듬해 1881년 5월 슈펠트는 국무성 파견으로 전권위임장을 들고 청국 톈진(天津)으로 왔다. 그는 청국에 1년 가까이 머물면서 이훙장과 십여 차례 만나 조약문 초안을 놓고 씨름하면서 수교 성립에 전념했다.

이훙장은 조약문에 조선이 청국의 속국이라는 것을 넣으려 했고 슈펠트는 이에 강력히 반대했다. 조약은 독립국 간에 체결하는 것이란 원칙을 고수했다. 조선 정부는 자국의 일이면서도 이훙장의 태도 때문에 조심스러웠다. 자칫 독립국을 자처해 나섰다가 판이 깨질 것을 우려했다. 협상 종반으로 접어든 1882년 4월 슈펠트의 주장이 우세해진 상황에서 조선 측은 조약 체결 후 지금 까지의 사신 왕래 대신 북경에 조선 공사를 상주시키는 문제에 관한 협의를 제안했다. 이에 청국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훙장은 슈펠트의 주장을 꺾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그의 의견대로 조약문을 작성하게 했다. 5월 8일 슈펠트 일행은 쿠퍼 함장의 스와타라호를 타고 인천으로 와서 5월 14일 선상에서 조선 대표를 처음 만났다. 영어에 능통한 이훙장의 막료 마건충(馬建忠)과 이종원 같은 조선 역관들 사이에서 ‘조선어-중국어-영어’가 오가는 3자 통역이 이루어졌다. 19일 절차 협의를 시작한 후 20일 슈펠트 대표 일행이 인천에 상륙해 조선 대표의 관아를 방문했다. 이때 조인식을 5월 22일로 정하고, 스와타라호를 바라볼 수 있는 제물포 해안에 장막을 치고서 협약을 맺기로 했다. 22일 조인이 끝난 뒤 축하 분위기가 장관이었다. 쿠퍼 함장이 장막 밖으로 나와 나뭇더미에 불을 붙여 신호를 올리자 스와타라호는 21발의 축포를 발사해 조선 국왕에 경의를 표했다. 장막 안의 조선 측 인사들은 모두 일어나서 엄숙히 답례했다. 이어 스와타라호는 15발로 청국의 도움에 경의를 표하고, 청나라 군함 위원(威遠)호도 이에 답하며 15발을 쏘았다.

조약을 둘러싼 청국과의 갈등

조미수호통상조약 성립에는 이처럼 미국 전권대표 슈펠트의 노력이 컸다. 그가 밝힌 (1) 표착 미국인 구제 문제 (2) 조선 반도의 전략적 지위, 두 가지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열성이었다. 그는 24일 인천을 떠나 상해로 돌아가 전보로 미국 국무성에 보고한 뒤 7월 29일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갔다. 그는 조인 때 조선 측으로부터 받은 태극기 도안을 귀국 후 바로 해군성에 보내 『해양국가의 깃발』 초판에 싣도록 하는 열정을 보였다.

문제는 사후였다. 두 달 뒤 대원군이 개화에 반대하며 군란을 일으키자 이훙장은 무릎을 쳤다. 조선 군주(고종)가 원하지 않는 군란을 책봉 주인 청국 천자가 좌시할 수 없다는 구실로 천자의 친위대를 조선에 파견했다. 청나라 영향권에서 빠져나가려는 조선의 뒷덜미를 잡는 폭력이었다. 청국은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朝中商民水陸貿易章程)」1)이란 규정을 내놓고 이를 시행할 총감독으로 위안스카이(袁世凱)를 보냈다. 이 규정은 북양대신 이훙장이 조선 군주와 대등한 지위에서 이런저런 지시를 내린 ‘장정’으로, 슈펠트와의 힘겨루기에서 진 데 대한 보복이었다. 미국 측은 예정대로 1883년 4월에 푸트 공사를 조선에 보내 왔지만, 조선은 1887년에서야 비로소 주미공사로 박정양을 보낼 수 있었다. 위안스카이가 공사 파견은 청국의 허용 형식 아래 이루어져야 한다고 억지를 부렸기 때문이다. 조선 정부가 이 난관을 뚫는 데 4년이 걸렸다.

  • 이번 전시에 소개된 태극기 초기 도안
  • 『해양국가의 깃발』에 실린 다양한 국기들

슈펠트는 1886년 10월 조선 국왕 초청으로 다시 한국을 방문했다. 당시 64세, 수교 중 비서 역할을 했던 딸과 함께 내한했다. 고종이 공사 파견 실행이란 중대사를 놓고 어려움을 겪을 때였다. 감사를 표하고 자문을 얻기 위한 초청이었을 것이다. 1882년 조약 체결 직후 고종은 미국 에디슨 전등회사와 건청궁(경복궁 북단) 일대 전기시설을 계약했고, 1887년에는 경내에 반 3층의 서양식 건물까지 준공한 가운데 점등식이 거행됐다. 슈펠트 부녀가 이 행사에 빠졌을리 없다. 『고종실록』이 일본이 아닌 우리 손으로 편찬됐다면 이런 사실들이 상세히 실렸을 것이다.

굳건한 동맹 체제를 확인할 수 있는 특별전

조미조약을 둘러싼 청국과의 갈등은 근대 한·중·일 3국 국제관계의 서막에 불과했다. 1894년 청일전쟁 이후에는 일본이 조선·한국을 괴롭혔다. 일본은 1904년 러일전쟁 이후 대한제국을 강제로 자국에 병합했다. 청국의 속국 시비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만행이다. 그 역사 전개에서 미국의 입장은 불투명했다. 1894년 청일전쟁 때 일본은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려고 했다. 이때 군주 고종은 재미 공사(이승수)에 긴급히 연락해 조미조약 제1조를 근거로 들며 미국 대통령에게 도움을 청하도록 했다. 제1조는 결국 제3국이 조선에 압박을 가할 때 미국은 최선을 다해 돕는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미국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일본 측에 친서를 보냈고,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 내각은 보호국화 정책을 포기했다. 그 후 일본 정부는 온갖 수단을 동원하며 미국 정부를 제 편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 결과 러일전쟁(1904~1905) 때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을 도왔고, 1919년 국제연맹 창설 때도 한국이 기대한 민족 자결주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1935년에서야 미국은 1905년 ‘보호조약’을 불법으로 판정하며 일본 비판으로 돌아섰다.

전시물을 살펴보는 관람객들

미국에 대한 한국인들의 신뢰는 1950년 6·25 전쟁을 통해 비로소 확고해졌다. 그러나 또 한 차례의 시련이 따랐다. 1951년 9월 일본의 식민 지배 책임 문제를 다루는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한국 참가가 배제된 것이다. 미국은 중공군의 6·25 전쟁 개입을 보고 소련군이 홋카이도로 침공할 것을 우려하며 ‘미·일 안보조약’을 우선하느라 한국을 제대로 배려하지 못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일본의 한국 식민 지배 불법성을 확실하게 밝히지 못한 것은 한일 간 알력의 근원이 됐다. 그동안 국력이 약했던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힘겹게 버텨왔다. 반면 지금은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한국 대기업의 세계적 약진으로 국제질서 모색의 중심축에 들고 있다.

이번 한미수교 140주년 기념 특별전에는 1882년 조약 당시 고안된 최초의 태극기(도안) 2점과 그 태극기가 실린 『해양국가의 깃발』 등 한미수교 140주년을 기념하는 유물이 공개됐다. 이번 특별전을 통해 한국과 미국 간 동맹을 더욱 굳건히 다지며 우리가 국제사회에서 좀 더 중심에 설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