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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뚤어진 집 <최나경과 함께하는 챠밍 플루트>

“집은 최초의 세계다. 그것은 정녕 하나의 우주다.” 프랑스의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는 집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집에 머물 때 사람들은 안정감을 느낀다. 그런데 그 집이 비뚤어져 있다면? 십 대 시절 명문 음악대학인 커티스음악원으로 유학을 떠났던 플루티스트 최나경은 줄곧 비뚤어진 집에서 균형을 잡으며 살았다. <최나경과 함께하는 챠밍 플루트>에는 그러한 그의 지난 시간들이 담겨 있다. 사진 / 김성재(싸우나 스튜디오)

다양한 레퍼토리 선보인 플루트 공연

지난 12월 2일 ‘박물관 함께 콘서트’의 일환으로 네이버 TV를 통해 <최나경과 함께하는 챠밍 플루트> 공연이 생중계됐다. 본래 오프라인 공연으로 기획했으나 사회적 거리두기가 2단계로 격상하면서 온라인 공연으로 전환됐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공연 기획위원 박현진의 진행으로 피아니스트 박진우의 연주가 함께한 이번 공연은 클래식과 영화음악을 넘나드는 최나경(Jasmine Choi)만의 레퍼토리로 코로나19로 지친 이들에게 큰 위로를 선사했다.
2018년 영국 클래식 음악 잡지 『신피니 뮤직(Sinfini Music)』에서 ‘역대 최고의 플루티스트 10인’ 중 한 명으로 이름을 올린 최나경은 십 대 시절 커티스음악원으로 조기 유학을 갔고 이후 줄리어드스쿨 음악대학원 석사, 신시내티 교향악단 부수석, 비엔나 심포니 오케스트라 수석 등을 거치며 세계 최정상 플루티스트로 자리 잡았다. 외국인들의 댓글 비중이 높은 최나경의 유튜브 채널과 SNS를 보면 그가 해외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공연은 로베르트 알렉산더 슈만(Robert Alexander Schumann)의 <3개의 로망스>로 첫발을 뗐다. 슈만이 아내 클라라에게 바친 이 곡을 최나경은 차분하다가 불안한 기운이 스며들고, 그러다 다시 들뜬 분위기로 전환되는 드라마틱한 분위기로 풀어냈다. 이어서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의 <라트라비아타 주제에 의한 환상곡>을 선보였다. 파올로 타발리오네(Paolo Taballione)가 플루트를 위해 새롭게 편곡한 이 곡은 지루할 틈 없이 다양한 전개가 돋보였다.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연주 덕에 곡은 더욱 빛을 발했다. 얼마 전 작고한 엔니오 모리코네(Ennio Morricone)의 영화음악 <시네마 천국> 주요 삽입곡들도 플루트로 들려주었는데, 듣는 내내 영화 속 영화관 풍경이 떠올랐다. 영화관이라는 특정 공간에서 함께 영화를 보며 희로애락을 함께하는 영화 속 사람들을 생각하니, 최나경의 공연장이 떠올랐다. 공간이 주는 힘은 생각 이상으로 세다. 한정된 공간에 모여 연주자와 관객이 생각과 호흡을 나누는 일 자체가 예술 작품이나 다름없다. 온라인 공연이지만 이날 최나경은 관객과 한 공간에서 소통하는 듯한 착각을 느끼게 할 만큼 감정 이입이 높은 연주를 선보였다.
다음으로 비토리오 몬티(Vittorio Monti)가 1904년에 작곡한 <차르다시(Czardas)>가 이어졌고, 마지막으로 오프라인 공연의 앙코르를 대비해 준비했다는 두 곡을 선보였다. 먼저 비틀즈의 <I Will>을 연주했고 영국 출신의 현대음악 작곡가 이안 클라크(Ian Clarke)가 만든 곡으로 기차 소리를 형상화한 <Great Train Race>가 대미를 장식했다.

빠르지 않게, 꾸밈없이 진심으로

플루트는 구멍 뚫린 관을 리드 없이 입으로 불어서 관 속의 공기를 진동시켜 소리를 내는 목관악기이다. 목관악기 중 유일하게 리드가 없어 숨이 취구에 바로 닿고 혀가 상대적으로 자유로워 보다 경쾌하면서도 우아하고, 서정적이면서도 화려한 음색을 선보인다. 최나경은 이러한 플루트의 특성을 효과적이면서도 창의적으로 표현하는 역사상 가장 뛰어난 플루티스트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대중에게는 밝게 웃는 모습으로 각인돼 있지만 그의 인생이 마냥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커티스음악원 재학 시절 손가락 마비 증세를 겪으며 6개월여 동안 플루트를 만질 수조차 없었다. 감정의 밑바닥을 헤매던 그를 위로하던 것은 슈만의 음악이다. 그는 슈만의 음악을 불안정함이라 표현한다. 깊고 우울한 그 감정들이 당시 최나경의 마음을 툭, 건드렸다. 자신을 이해해준다는 느낌, 위로해주는 느낌을 받았다고. 실제로 슈만 역시 오른손을 다쳐 피아니스트로 활동하지 못한 적이 있다고 하니 둘 사이에는 적지 않은 연관 관계가 있는 셈이다. 최나경은 손가락 마비 증상이 극적으로 호전된 이후 슈만의 <3개의 로망스>를 첫 연습곡으로 택했다. 이번 온라인 공연에서도 마찬가지로 첫 곡으로 선택해 연주했다. 마치 지난 자신의 시간을 풀어내듯 담담하면서도 부드럽게.
공연 내내 최나경은 ‘빠르지 않게, 꾸밈없이 진심으로’ 연주하며 관람하는 이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꾸준히 쌓아 올린 지난 시간들이 그의 음악을 웅숭깊게 만들었다. 물론 한길을 오래 걷는 동안 어찌 행복한 날만 있을까. 누구에게나 비뚤어지는 시기가 있다. 비뚤어진 집에서 최나경은 좌절하기보다 좀 더넓게 보는 길을 택했다. 균형을 잘 잡으며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했고, 플루트를 매개로 한 다양한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덕분에 그가 지은 집은 안정감을 되찾았다. 시련이 그에게 새로운 길을 보여준 셈이다. 지금 이 순간 대중이 최나경의 표정에서 마주하는 그 밝은 미소는 그의 그러한 균형 감각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그의 플루트 연주를 흉내조차 낼 수는 없으나, 그 균형 감각만큼은 배울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