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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병이라 불린 전염병

결핵은 기원전 7,000년경 석기 시대의 화석에서 그 흔적이 발견된 이래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생명을 앗아간 감염 질환으로, 1882년 독일의 세균학자 로베르트 코흐(Robert Koch)가 결핵의 병원체인 결핵균을 발견한 후 같은 해 3월 학회에 발표하며 세상에 알려졌다.
소장 유물을 통해 근현대사에서 ‘3대 민족 독’이라고까지 불렸던 결핵에 대해 살펴본다. 글 / 자료관리과 김현주 학예연구원

한 번 걸리면 죽는 ‘백색 페스트’

결핵은 주로 폐결핵 환자에서 나온 미세한 침방울 혹은 비말핵(核)이라 불리는 바이러스 입자에 의해 직접 감염되지만, 감염된다고 모두 결핵에 걸리는 것은 아니다. 대개 접촉자의 30% 정도가 감염되고, 감염자의 10% 정도가 결핵 환자가 되지만, 나머지 90%는 평생 건강하게 지낸다. 발병자 중 50%는 감염 후 1~2년 안에 발병하고 나머지 50%는 그 후 일생 중 특정 시기에, 즉 면역력이 감소할 때 발병한다.
과거 결핵은 한 번 걸리면 죽는 무서운 병으로 인식됐다. 실제로 19세기 산업혁명 이후에는 결핵환자가 급증해 ‘백색 페스트’라고 불릴 정도로,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무서운 감염병이기도 했다.
1920년대까지 우리나라 결핵환자는 6,000명 미만에 머물렀으나 1931년을 기점으로 증가하기 시작해 1930년대 중반 무렵에는 1만 명을 넘어설 만큼 심각했다. 결핵으로 인한 사망률도 증가했다. 예컨대 1926년 인구 10만 명당 결핵사망률은 18.5%였으나 1932년에는 31.7%, 1938년 42.3%, 1941년과 1942년에는 각각 61.3%와 71.7%로 증가했다. 당시 결핵이 얼마나 만연했는지 결핵을 매독, 기생충병과 함께 ‘3대 민족 독(毒)’으로 규정할 정도였다.
결핵에 관한 시설 확충과 환자 치료에는 많은 예산이 소요되지만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예산 지원은 매우 미미했다. 1935년에는 결핵환자 치료를 담당할 요양기관 설립을 위해 다음 해 예산으로 1만 7,000원을 상정했지만 재무당국에서 재정 곤란을 이유로 전액 삭감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결핵 예방과 치료를 위해 예방 지식의 보급과 요양소의 설치 및 허약 아동에 대한 양호(養護), 그리고 건강상담소 등 공중위생을 위한 생활 기반이 필요했지만 조선총독부는 예산을 지원하지 않았다.
반면, 일본의 형편은 조선과 달랐다. 일본은 1910년대부터 결핵요양소를 건설하고자 노력하였고, 1919년 3월에는 결핵예방법이 제정됐다. 이를 통해 결핵요양소를 설치하며 지방공공단체 및 공익단체에 대한 국고 보조가 적극 이루어졌고 법령을 통해 빈곤한 결핵 환자에 대한 입원 보조와 생활 보조도 시행되었다. 그러나 조선에서의 결핵 대책은 ‘식민지’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요양소 설립 및 증설, 환자에 대한 국고 보조처럼 비용이 많이 드는 사업보다는 「결핵 예방데이 예방 7칙(結核豫防デー 豫防七則)」 같은 결핵 예방 전단을 통해 개인위생을 강조하고 공공장소에 타구(唾具)를 설치하는 등 소극적인 행정에 그쳤다.

  • 일제 강점기에 발행된 「결핵 예방데이 예방 7칙」 안내 전단
  • 보건사회부에서 결핵병 예방 검진을 장려하고, 결핵 자가 진단법을 소개하고자 발행한 전단
  • 결핵 예방 홍보를 위해 제작된 <결핵 없는 내일> LP 음반
  • 보건사회부에서 결핵병 예방 검진을 장려하고, 결핵 자가 진단법을 소개하고자 발행한 전단
  • 신신약품에서 제작한 대한결핵협회 포스터

한국의 보건관리체계의 근간이 된 국가결핵관리사업

1977년 직장 의료보험제도를 비롯한 포괄적인 국가보건관리가 시행되기 전까지 결핵은 국가가 ‘전 국민’을 대상으로 무료로 치료해주고 일상적으로 관리해주는 유일한 질병이었다. 그러므로 국가결핵관리사업은 사실상 한국 현대보건관리체계의 근간이었다. 특히 1953년 11월 6일 대한결핵협회가 창립되면서부터 결핵 환자에 대한 본격적인 치료가 시작됐다. 6·25 전쟁으로 결핵이 크게 만연하자 기독교의사회, 한국복십자회 및 조선결핵예방회 등 몇몇 항결핵 조직이 협력해 대한결핵협회라는 강력한 단일기구로 통합한 것이다. 대한결핵협회는 결핵 환자의 조기 발견과 치료, 결핵 예방 백신 생산과 접종 실시, 결핵에 대한 보건교육과 계몽 지도, 결핵 예방과 발견 및 진료, 보건소 결핵 관리요원의 기술 지원, 이동 X선 검진 등 다양한 업무를 수행했다.
국가의 결핵 관리사업으로 현재 우리나라의 결핵 환자는 과거에 비해 크게 감소했지만, 여전히 결핵으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은 적지 않다. 2019년 기준으로 국내 전체 결핵 환자 수는 23,821명(10만 명당 46.4명)으로, 2018년 26,433명(10만 명당 51.5명) 대비 9.9% 감소했다. 하지만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한 의료급여 수급권자 결핵환자 수는 2,207명(10만 명당 148.7명)으로 높은 수치를 보인다. 또한 우리나라는 34개 OECD 회원국 중 2011년 기준으로 결핵의 발생률(인구 10만 명당 100명)과 유병률, 사망률이 가장 높다. 결핵은 여전히 많은 관심이 필요한 질병인 셈이다.

이달의 기증 유물

  • 1943년, 내가 아이였을 때_한득추 씨가 2010년 기증한 영생유치원 수료 사진과 보육증서(1943년) 한득추 씨가 2010년 기증한 영생유치원 수료 사진과 보육증서(1943년)
1943년, 내가 아이였을 때

영생(永生)유치원은 1905년에 창립한 장로교회인 항서교회 부속 유치원으로, 당시 하와이 동포였던 최순이 씨의 희사금 1,000원과 기타 연금 1,500원을 보태 1936년 44평 규모로 개원했다. 당시 영생유치원은 1년 과정이었는데, 2010년 한득추 씨가 기증한 보육증서를 보면 기증자의 한글 이름(한득추)이 아니라 창씨개명된 일본식 이름(淸山得秋)이 표기돼 있다. 여기에서 날짜는 소화 18년 3월 22일로 표기됐으나, 함께 기증 받은 수료식 사진 상단을 보면 ‘제 10회 영생유치원 보육 기념 소화 18년 2월 22일’이라고 쓰여 있다. 배경이 된 건물에는 영생유치원과 ‘(항)서여자야학원’의 현판이 확인된다. 기증자는 이 외에도 2010년에 과제심사 우등상장, 통지표, 임명장, 성적통지표 등 광복 전후 시기 때 유치원·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에서 받은 자료들을 기증했다. 광복 전후의 교육과정을 살필 수 있는 가치 높은 연구 자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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