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공감 로고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단재 선생에게 한없는 존경을 담아

사학자, 언론인, 그리고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존함 앞에는 여러 수식이 붙습니다. 그만큼 선생은 우리민족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 도림마을에서 유생인 고령 신씨 광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선생은 6세 때부터 한학을 교육받아 14세 때 사서삼경을 독파해 신동이라 불렸습니다. 이후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 연구에 힘쓴 선생은 신문기자 및 논설위원으로 활동하며 항일 언론 운동을 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또한 안창호 등과 함께 신민회를 만들었으며, 국채 보상 운동을 벌일 때는 스스로 담배를 끊고 그 돈을 나라 빚을 갚는 데 보태는 등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아래 휘호는 선생이 독립운동가였던 화사 이관구 선생에게 쓴 칠언율시(七言律詩)입니다. 「연경별이화사(燕京別李華史)」라는 작품인데 연경은 중국 북경, 이화사는 이관구 선생을 뜻합니다. 연경을 떠나며 독립운동 동지인 이관구 선생에게 보내는 시편이지요. 우리의 앞길은 하늘 끝까지 뻗은 가시덤불이겠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공업을 이룰 것이니 독립에 대한 의지를 잃지 말자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1936년 2월 옥사할 때까지도 항일 정신을 잃지 않았던 선생의 생각과 행동에 한없는 존경을 보냅니다.

  • 단재 신채호 휘호 「연경별이화사(燕京別李華史)」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만이 살 길’이라는 생각으로 우리나라 고대사를 연구했습니다. 선생의 역사 연구는 실제 증거를 강조하며 철저하게 민족주의 역사관을 바탕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광개토왕릉을 비롯해 고구려와 발해의 옛 유적지를 직접 돌아보았고, 『조선 상고사』, 『조선 상고 문화사』, 『조선사 연구초』 등의 저서를 통해 우리 고대사를 체계화하는 데 큰 업적을 쌓았습니다. 선생의 말처럼, 앞으로 나아가려면 지나온 길을 되살펴야 합니다. 무엇을 반성하고 깨우치며 배울지 알 수 있다면 우리의 미래는 지금보다 더 밝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