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특별전 <대한독립 그날이 오면>에 전시됐던 임시의정원 태극기
우리 역사 낯설게 보기

임시의정원
태극기에 담긴,

펄럭펄럭 나부끼는
저항 정신과 애국

태극기의 깔끔하고 우아한 디자인에 반한 것은 1996년 여름 천안 독립기념관 방문 때였다.
그때 나는 대학교 문화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한국 역사 및 문화의 주요 유적지를 찾아다녔다.
독립기념관에 도착하자마자 처음 목격한 것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태극기가 바람에 너풀거리는 장면이었다.
내가 보기에 태극기는 기하학적인 패턴을 지닌 국기였는데, 독립기념관 앞에서 마주친 수많은 태극기는
그 패턴들이 여러 번 곱해지면서 지평선까지 뻗어나가는 것 같았다. 글 폴 카버(Paul Carver) 전 서울글로벌센터장, 영국 출신 유튜버

사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내 인생에 자주 등장한 태극기

대학 시절 한국을 여행하다가 기념품으로 태극기를 샀다. 영국으로 돌아간 나는 대학교 기숙사 벽에 걸린 영국 국기 옆에다 걸려고 여행 가방에서 태극기를 꺼냈다. 그러나 곧 수수께끼에 직면했다. ‘어느 쪽이 위쪽일까?’ 영국 국기 유니언잭(Union Jack)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등 영국으로 연합한 네 개 나라 중 세 개 나라의 국기를 합쳐서 구성됐다. 한눈에 볼 때 대칭적인 무늬처럼 보이지만 사실 좌우 대칭도, 상하 대칭도 아니다. X자 모양의 빨간 십자가 끝의 위치가 각기 약간씩 다르다. 이를 인지하지 못해 거꾸로 건 예도 있는 만큼, 나는 태극기를 올바르게 걸어 내 방에 전시하고 싶었다.

교내 도서관에서 국기 백과사전을 찾아보니, 세 개의 선으로 이루어진 ‘건’이라는 괘가 왼쪽 상단에 있어야 했다. 초기 버전의 태극기는 지금과 달리 네 개의 괘가 다양한 순서로 배열돼 있는데, 이는 뒤늦게 안 사실이다. 나는 이 사실을 접하고 태극기를 제대로 걸었지만 각 요소가 가진 의미까지는 알 수 없었다. 3~6개의 선으로 이뤄진 그 괘들이 내게는 일종의 모스 부호처럼 보였다.

그 이후로 태극기는 내 인생에 자주 등장했다. 2002년 월드컵 때 시청 앞에서 태극전사를 응원하면서 나는 볼에 태극기를 그렸고, 광복절 같은 국가 기념일이 되면 집 밖에다 태극기를 걸어두었다. 자전거 라이딩을 갈 때면 구리한강시민공원에 거대한 태극기가 세워진 곳을 오갔고, 한국 국가대표 축구팀 경기를 보러 가면 붉은악마가 경기 전에 준비하는 거대한 태극기는 항상 내좌석을 거쳐갔다.

내가 태어나 자란 영국에 비해 한국 사람들은 국기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태극기를 휘날리는 것 같다. 최근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나는 태극기가 1883년에 국기로 지정됐다는 걸 알게 됐다. 태극기의 역사는 140년 정도였다. 중국 이외에는 문호를 닫으며 외교를 피했던 ‘은자의 왕국’ 조선 입장에서는 국가를 식별할 국기가 필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역사는 길지 않지만 다른 국기의 단순한 무늬와 차별화된 깊은 의미와 독특한 디자인은 내 마음에 스며들었다. 태극기에는 한국 사회만큼이나 복잡하면서도 깊은 의미가 내포된 것처럼 느껴졌다.

  • 1923년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태극기 (등록문화재 제395-1호)

유니언잭과 임시의정원 태극기에 담긴 염원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아주 특별한 태극기를 감상했다. 독립운동가 김붕준 선생(1888~1950)의 부인 노영재가 손수 만든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태극기(등록문화재 제395-1호)의 복제본이 5층 역사관 천장에 걸려 있었다. 중국 상하이 망명 시기에 직접 손바느질로 만들었다고 하니 더 뜻깊다. 한국에서 지내다 보면 일제강점기의 참혹한 역사를 모를 수 없다.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나라가 독립된 국가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애썼다. 자유로우면서도 제대로 된 기관을 갖춘 국가로 만들기 위해 힘썼다. 그리하여 1919년 중국 상하이에 항일 민족 운동의 중심 기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통합된 형태로 탄생했다. 임시의정원은 임시정부의 입법기관이었고, 1923년경 만들어진 임시의정원 태극기는 아마도 이곳에서 펄럭였으리라.

나는 그것이 일본에 대한 경멸을 도발적으로 드러낸 것이라 느꼈다. 펄럭이는 태극기를 상상하니, 제2차 세계대전 중 인도네시아에서 일본군에게 잡힌 영국군 포로들의 노력이 떠올랐다. 포로수용소 상황은 극도로 가혹했다고 알려져 있다. 포로들은 ‘죽음의 철도’ 부설과 강제 노동, 식량 부족과 잦은 고문 등으로 버티기가 무척 힘들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사기를 잃지 않으려고 비밀리에 유니언잭을 만들어 아침저녁으로 경례했다. 그들은 속옷의 흰색 천과 모기장의 파란색 천, 인도네시아 군인모자 안감에 쓰인 빨간색 천을 사용해 손수 국기를 만들었다. 전쟁 후 살아남은 포로들은 그 깃발을 영국으로 가져갔고, 현재는 웨일스의 스완지에 있는 한 교회에서 보관 중이다. 유럽 전역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는 다수 존재한다.

한국과 영국의 역사는 서로 달라서, 이러한 유사점이나 공유된 경험을 찾을때면 항상 마음이 훈훈해진다. 내가 외국인이라는 느낌이 옅어지면서 한국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 기분이 든다. 비밀스럽게 만들어진 유니언잭 덕분에 전쟁 포로들이 살아남았던 것처럼, 현재 한국이 자유롭고 독립적이면서 강대한 국가로 발전하는 데 크게 이바지한 것은 바로 ‘임시의정원 태극기’에 담긴 저항 정신과 애국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태극기는 어디서든 쉽게 구할 수 있고 가격도 몇 천 원에 불과하지만, 손바느질로 완성된 임시의정원 태극기에 담긴 그 강력한 정신과 노력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전시된 이 태극기를 관람하면서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영웅들이 무엇을 염원했는지, 그 염원과 이상을 현재의 우리는 얼마나 잘 지켜내고 있는지 잠시 되새겨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겠다.

  • 5층 역사관 천장에 전시된 임시의정원 태극기(복제본)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일생을 헌신하고 대한민국이 문화강국이 되길 꿈꿨던 백범 김구 선생의 삶과 사상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고자 2002년 10월 ‘백범기념관’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했다. 2008년에는 지금의 이름(백범김구기념관)으로 변경돼 현재에 이른다. 『백범일지』(보물 제1245)를 비롯한 백범 선생 관련 전시자료를 기반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역사와 한국 근현대사를 이해할 수 있는 전시와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전시관은 두 개 층을 운영하고 있는데 1층에 들어서면 중앙홀에 위치한 백범좌상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태극기를 배경으로 자리 잡은 순백색의 좌상을 중심으로 한 1층 공간은 연보와 유년기, 동학·의병 활동, 치하포 의거와 신민회 활동, 구국운동 활동 등을 보여준다. 상징홀에 위치한 연보에서 관람객은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조국의 자주독립에 힘쓰기까지 파란만장했던 그의 시간과 만날 수 있다. 영상실에서는 ‘백범 선생의 생애와 사상’을 영상으로 만나며, 이후 유년기부터 시작해 혈기 넘치는 청년으로 성장하는 백범 선생의 모습을 전시자료로 확인할 수 있다. 2층 전시관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인애국단, 한국광복군, 『백범일지』 출간 등 본격적인 독립운동 활동상이 전시돼 있다.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하이로 망명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한 시기부터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한국으로 돌아와 자주·통일 국가 수립을 염원하던 백범 선생의 뜻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그 밖에 백범 선생과 효창원 애국 선열 묘역에 계신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백범일지』 독서감상문 쓰기대회도 진행하고 있다.

관람
시간

10시~18시(입장 마감 17시)

휴관

매주 월요일, 신정·구정·추석 연휴, 기타 관장이 정하는 날

관람료

무료

주소

서울 용산구 임정로 26(효창동 255)

문의

02-799-3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