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오늘

여자도 사람이외다

  • 3월 8일 여성의 날은 세계 모든 여성의 권리 향상을 위한 날이다. 1908년 미국에서 일어난 당시 시위에서 여성 노동자들은 뉴욕의 광장에 집결해 빵(생존권)과 장미(인간 존엄을 누릴 권리)를 달라고 외쳤다. 1896년 태어난 나혜석이 1948년 12월 시립 자제원 병동에서 무연고자로 눈을 감을 때까지 줄곧 외친 것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둠 속 밝은 달이 되어

    1896년 4월 태어난 나혜석은 최초 ‘아기(阿只)’라 불렸다. 아이가 언제 죽을지 몰라 이름을 짓지 않는 이유도 있었지만, 당시 여성에게는 공식적인 이름이 없는 경우가 흔했다. 이후 ‘명순(明順)’을 거쳐 ‘혜석(惠錫)’이란 이름으로 평생을 살아간 그는 자신의 호를 ‘밝은 달’이란 뜻의 정월(晶月)이라 지었다. 여성으로서 온전히 살아가기 힘들었던 시절, 그는 온전한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갔을 뿐 아니라 자신의 호처럼 어둠 속 밝은 달이 되어 여성해방운동에 온 인생을 바쳤다.
    삼일여학교와 진명여학교에서 모두 성적이 뛰어났던 그는 둘째 오빠 경석의 권유로 일본 도쿄의 사립여자미술학교 서양화부에 입학(1913년)했다. 유학 시절 이미 근대적 여성 의식에 눈을 뜨고 자아의식으로 충만했던 그는 아버지의 혼처 제안을 거절한 대신 서양화가이자 작가로 활동하며 온전한 여성이자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고자 했다. 1918년 사립여자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 후 3·1 운동에 참여하는가 하면, 미술교사로 1년간 활동했고, 고려화회에서 구본웅과 같은 후학을 지도했으며, 1920년에는 『신여자』라는 잡지를 창간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주목할 만한 것은 전업화가로 활발히 활동했다는 점이다. 1921년 3월 19일에는 유화 개인전을 열었는데 이는 서울에서 열린 최초의 유화 전시회였다. 여성 화가 최초의 개인전이기도 했다. 70점의 유화 작품을 내건 전시에는 5,000여 명의 관람객이 다녀갔고 20여 점의 작품이 고가에 팔리기도 했다. 당시 나혜석은 결혼 1년차, 만삭의 몸이었다.

    • 나혜석의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63.5×50(cm), 1928(추정) Ⓒ 수원시립미술관

나혜석의 두 번째 생()

글과 미술 모든 측면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던 나혜석은 인생의 큰 암초를 만난다. 1920년 결혼했던 남편 김우영과의 이혼 이후 쏟아진 따가운 비난과 시선이 그것이다. 만주 안동현 부영사였던 김우영의 구미 시찰에 동행하며 18개월간 세계 일주를 하는 행복한 때도 있었으나 결혼 생활은 현실일 뿐, 그의 생각과는 딴판이었다. 시부모와 김우영의 형제들은 끊임없이 그의 집에 들이닥쳤고, 형제의 학비를 책임지게 되는 등 나혜석의 어깨는 갈수록 무거워졌다. 아내와 여자, 사회인으로서 모두 성공적으로 살고 싶었던 그에게 그 상황은 막막함 자체였다. 이후 진행된 이혼 과정에서 남편 김우영이 주장하는 이혼 사유는 C(최린)와 나혜석의 불륜 의혹이나, 나혜석은 글을 통해 오해일 뿐이라며 이를 부인했다.
반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남편과 주변 사람들은 비난과 조소를 쏟아냈다. 여성은 남성에게 무조건 순응해야 했던 때, 여성의 인내와 침묵이 칭송받던 때였다. 1934년 『삼천리』에 발표한 「이혼 고백서」에서 그는 이렇게 밝혔다. “나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후회합니다. 나는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어떠한 것인지 이 세상이 어떠한 곳인지 모르고 태어난 것 같사외다.”
이후 이 글에서 나혜석은 여성의 정조를 요구하면서도, 정작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하는 조선의 남성 심사를 지적했다. 「신생활에 들면서」에서는 여성의 정조는 취미일 뿐 도덕이나 법률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세계 일주를 다니며 마주친 유럽과 미국 여성들은 그에게 롤모델이 됐다. “일반으로 구미 여성은 창조적이요 예술적이다. 그러나 구미 여성은 인격적으로나 두뇌로나 학술상 조금도 남자의 그것보다 결핍하지 아니해 당당한 사람 지위에 있는 것이다.” 1)
‘조선의 유식 계급 남자 사회’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는 활발하게 그림을 그리는 한편, 여성해방운동에도 앞장섰다. 하지만 이를 이해할 수 없었던 조선 사회는 그를 공격하거나 차갑게 냉대했다. 그는 자식들과 생이별을 했고, 든든한 후원자였던 오빠 경석에게는 외면을 당했다. 경제적인 어려움은 그를 더욱 구석으로 내몰았다. 이후 불교에 심취했던 그는 1948년 12월 10일, 서울 원효로 시립 자제원 무연고자 병실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는 당시 국가에서 발행하는 『관보(官報)』의 행려사망 항목 중 일부분으로 짧게 소개됐다.
“여자도 사람이외다”라고 외친 나혜석은 남자를 싫어하라고 외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글에서 자주 언급했듯, 남녀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듯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했다. 시대를 잘못 타고난 나혜석의 첫 번째 생은 무연고자 병실에서 마감했지만, 두 번째 생은 지금 이 순간 한국 사회에 활활 타오르며 살아 있다. 자신은 사상가나 교육자가 아니고 예술가나 종교가도 아니며 ‘다만 사람의 탈을 쓴 여성’이라 외쳤던 나혜석의 이야기들은 현재를 살아가는 수많은 여성들에게 적지 않은 귀감이 되고 있다.

글로 엿보는 나혜석

우리 조선 여자도 인제는 그만 사람같이 좀 돼 봐야만 할 것 아니오? 미국 여자는 이성과 철학으로 여자다운 여자요, 프랑스 여자는 과학과 예술로 여자다운 여자요, 독일 여자는 용기와 노동으로 여자다운 여자요. 그런데 우리는 인제서야 겨우 여자다운 여자의 제일보를 밟는다 하면 이 너무 늦지 않소? 우리의 비운은 너무 참혹하오그려. 「잡감(雜感)_혼인론, 여권론」, 『학지광』, 1917.3.

나는 사상가도 아니요, 교육가도 아니요 예술가도 아니요, 종교가도 아니외다. 다만 사람의 탈을 썼고, 여성으로 태어났으며, 사랑으로 살아갈 도리만 찾을 뿐이외다. 「백결 선생에게 답함」, 『동명』, 1923.3.

나는 바랍니다. 우리 여자가 자기를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또 남자를 사랑함으로써 생활 개량의 근본 힘을 얻어야 하듯이, 영원히 짝을 지어 살아갈 남자들도 자기를 사랑하고, 또 남들과 여자를 사랑함으로써 생활 개량의 근본 힘을 얻을 수 있기를 바라고 천만 번 바랍니다. 「생활 개량에 대한 여자의 부르짖음」, 동아일보, 1926.1.24~30.

이달의 근현대사

월별 주요 일정
날짜 내용
3

1

민족 대표 33인, 독립선언서 낭독(1919)

2

헤이그 특사 이상설 순국(1917)

5

조선일보 창간(1920)

10

도산 안창호 서거(1938)

14

한국군과 유엔군, 서울 재탈환(1951)

15

3·15 부정선거(1960)

20

방정환, 순수 아동 잡지 『어린이』 창간(1923)

25

창경원 동물원 준공(1909)

27

한국프로야구 출범(1982)

30

어머니날에서 어버이날로 개칭(1973)

4

1

유길준의 『서유견문』 출간(1895) / 동아일보 창간(1920)

2

항공독립운동가 안창남 사망(1930)

3

제주도에서 4·3 민중항쟁(1948)

4

국내 최초 정식 도로법 ‘도로령’ 공포(1938)

7

서재필, 독립신문 창간(1896)

9

매일신문 창간(1898)

11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1919)

19

4·19 혁명(1960)

25

순종 승하(1926)

29

윤봉길 의거(19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