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이야기

또 하나의 세계, 대한민국 임시정부

1910년 시작된 일제의 무단 통치는 대한민국을 끝도 없는 구석으로 몰아붙였다.
대한민국은 때때로 쓰러졌으나 끝끝내 무너지지는 않았다.
전국 각지에서 수없이 많은 항일운동이 전개됐는데,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특히 대표적인 항일운동을 펼쳤다.
그들은 조직적이었고 미국 등을 통한 외교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중국 상하이를 시작으로 곳곳을 떠돌며 악착같이 살아남았던 그들은 또 하나의 대한민국 그 자체였다.

    •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기념사진(독립기념관 소장)
  • 순종칙유, 일제강점의 시작

    1910년 8월 29일 순종황제는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일본 황제에게 양여한다는 칙유(勅諭)를 발표했다. 대한제국은 1905년 이른바 을사보호조약 체결로 일본에게 외교권을 박탈당한 데 이어 1910년에는 국권(주권과 통치권)까지 빼앗긴다. 대한제국은 이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1945년까지 길고 긴 일제강점의 역사가 시작됐다.

    3·1 독립선언

    1919년 3·1 운동은 “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는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미국 대통령의 1918년 ‘민주자결주의 선언’에 영향을 받아 전개된 전국적인 항일독립운동이다. 한용운, 손병희 등 민족대표 33인은 3월 1일 아침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 100장을 탁상에 펴놓고 찾아오는 사람에게 나누어주었고, 오후 2시 정각이 되자 한용운이 일어나 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그다음 모두 일어나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날 같은 시각 탑골(파고다) 공원에서는 학생·시민 등 5,000여 명이 모여 인도주의에 입각한 비폭력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민족 자결에 의한 자주 독립을 외쳤다. 이에 대해 이완용은 매일신보를 통해 조선 독립이라는 선동이 허언임에도 일반 대중이 자각하지 못하기에 글을 썼다고 동기를 밝히며, 무지하고 몰지각한 이들의 망동이 치안을 방해하고 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 3·1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이 낭독한 독립선언서
  • 임시정부 주요 활동

    3·1 운동 이후 우리 민족은 보다 체계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구심점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1919년 9월 중국 상하이의 임시정부와 서울의 한성 임시정부, 러시아의 대한국민의회 등을 통합해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발족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이 맡았다. 그리고 입법기관인 임시의정원, 사법기관인 법원을 두어 우리 역사상 최초로 삼권분립에 입각한 민주공화제를 출범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광복의 그날까지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서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렸고 미국에 구미외교위원회를 두어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펼쳤다. 또한 조직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비밀행정조직을 결성하고 독립 의지를 고취시키는 독립신문을 발행했으며, 일제 강제병합의 부당성을 집대성한 사료집을 편찬하기도 했다.

    • 미국에서 독립운동에 대한 재정적 지원활동을 전개한 안재창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민증(1924)
    • 1919년 설립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상하이 청사(독립기념관 소장)

    중국에서 진행한 항일 독립 전쟁 그리고 광복

    중국에서 진행한 항일 독립 전쟁은 의열 투쟁과 독립군 단체 지원, 한국광복군 창설 등의 군사활동으로 이어졌다. 의열 투쟁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이봉창과 윤봉길이 있다. 1932년 1월 이봉창의 도쿄 의거는 실패했으나 같은 해 4월 윤봉길은 상하이 의거를 통해 일본군 사령관 등 20여 명을 살상했다. 이에 대한 일제의 보복이 한층 거세지자 임시정부는 결국 상하이를 떠나게 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항저우로, 난징으로 또 창사를 거쳐 광저우, 치장 그리고 마침내 충칭에 이르기까지 긴 시간 동안 떠돌며 살아남았다. 지속적인 항일 독립 전쟁 도중 1945년 8월 광복을 맞이했고, 주요 간부들은 같은 해 11월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다. 국내의 혼란한 상황으로 인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각과 정책 등은 계승되지 못했으나, 자유주의 이념과 삼균주의 이념만큼은 1948년 대한민국 헌법에 반영돼 현재 대한민국의 기반을 닦았다.

키워드로 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정부 소재지(수도) 변화

상하이(1919~1932) ▹ 항저우(1932~1935) ▹ 자싱(1935) ▹ 난징(1935~1937) ▹ 창사(1937~1938) ▹ 광저우(1938~1939) ▹ 치장(1939~1940) ▹ 충칭(1940~1945) ▹ 서울(1945~1948)

정부 형태 변화(민주공화정)

대통령제(1919~1925) ▹ 내각책임제(1925~1927) ▹ 집단지도체제(1927~1940) ▹ 주석제(1940~1948)

주요 역사

1919년 3월 1일_ 3·1 독립선언
1919년 4월 11일_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
1919년 4월 23일_ 한성 임시정부 수립
1919년 9월 11일_ 대한민국 임시정부 통합 및 임시헌법 공포
1940년 9월 17일_ 한국광복군 창설
1941년 12월 10일_ 대일 선전포고
1945년 8월 15일_ 광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