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전 수행 중인 맥아더 장군과 미 해병대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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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오늘

6·25 전쟁의
판도를 바꾼

결정적 순간

인천상륙작전

북한의 기습으로 시작된 6·25 전쟁은 미국이 즉각적으로 개입하면서 내전이 아닌 국제전의 양상을 띠었다.
인천상륙작전은 6·25 전쟁 초기 가장 주목할 만한 작전으로 손꼽힌다.
이를 계기로 남진하던 북한을 주춤거리게 한 데다, 전쟁의 양상 자체를 바꾸었으니 말이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돼 28일 서울을 수복하기까지의 긴박했던 이야기를 살펴본다.

6월 29일: 맥아더 장군의 구상

6·25 전쟁 초기 상황은 국군과 유엔군에게 좋지 않았다. 막강한 병력과 무기를 앞세운 북한 조선인민군은 기습공격을 통해 우위를 선점했다. 남진을 거듭하며 남한 영토의 90퍼센트가량을 장악했고, 급기야 낙동강 전선까지 넘보고 있었다.

6·25 전쟁 발발 4일 후인 1950년 6월 29일에 한강 방어선을 시찰한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 장군은 바닷길을 통해 전세를 뒤집기로 한다. 이때 최초로 수립한 작전이 ‘블루하트(Operation Blue Heart)’이다. 미 제24사단을 투입해 북한군이 더는 남진하지 못하도록 저지하고, 미 제1기병사단을 측후방인 인천에 상륙시켜 적을 타격하겠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북한군의 진격 속도가 워낙 빨라 전선 상황이 악화하면서 인천으로 상륙하려던 제1기병사단이 전선 증원 병력으로 사용됐고, 그 결과 이 작전은 사용할 수 없었다. 이에 유엔군은 기본 개념은 유지하되 변화된 상황에 맞춰 새로운 상륙 계획을 마련한다. 암호명 크로마이트 작전(Operation Chromite), 우리가 ‘인천상륙작전’으로 알고 있는 그 작전이다. ‘크로마이트’는 크로뮴철광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안 유지에 신경을 써 작전과 연관이 없는 광석 이름으로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인천항에 내리는 미 제7보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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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개시

합동전략기획단은 최초 100-B(인천), 100-C(군산), 100-D(주문진) 등을 작전 후보로 구상했고, 맥아더는 이 중 인천으로 상륙하는 100-B 작전을 선호했다. 이 작전을 암호화한 이름이 ‘크로마이트 작전’이다. 최초 미 합참과 해군은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갯벌이 넓고 길어 어떤 지원이나 보급도 받을 수 없다는 점, 좁은 단일 수로라는 점 등을 근거로 인천을 반대했다. 하지만 맥아더 장군은 북한군의 후방을 완전히 단절시키려면 인천만 한 장소가 없다고 생각했다. 서울로 접근할 수 있는 최단 거리 항구가 위치해, 인천을 통해 서울을 탈환하면 적에게 심리적인 타격을 줄 뿐 아니라 북한군의 보급선을 차단할 수 있었다. 더불어, 인천과 낙동강 전선에서 함께 반격하면 북한군 주력을 섬멸해 아군의 희생을 최소한으로 하면서도 최대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판단했다. 결국 맥아더는 승인을 받아냈고, 1950년 9월 15일 역사적인 작전이 실행됐다. 미국의 해병과 보병 각각 1개 사단과 한국군 해병과 보병 각각 1개 연대, 거기에 영연방 연합군과 네덜란드군 등의 다국적군이 가세하며 상륙작전을 시행할 채비를 마쳤다.

먼저 그들은 상륙에 앞서 양동작전을 전개했다. 인천~군산과 삼척 등 주요 해안에 대규모 폭격을 가하며 북한의 관심을 분산시키는 것은 물론 인천 상륙에 방해가 될 만한 주요 시설을 미리 파괴했다. 북한은 인천상륙작전을 과연 알지 못했을까. 후대 이어진 연구에 따르면 당시 중국 측은 상륙작전을 예상했는데, 특히 서울과 가까운 인천을 예상 지역으로 짚기도 했다. 하지만 인민군 최고사령관이었던 김일성은 낙동강 전선에 집착해 인천을 방어하려던 육군 병력마저 낙동강 전선으로 보냈다고 알려진다.

15일 국군과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했을 때, 북한의 방비태세는 허술했다. 맥아더의 명령으로 실행된 인천상륙작전에는 항공모함과 구축함, 순양함 등 8개국 261척의 함정과 제10군단으로 편성된 대규모 선단이 투입됐으며 작전은 크게 세 가지 방향으로 진행됐다. 우선 월미도를 제압해 북한의 반격에 대항할 토대 및 방패막을 만들었고, 인천항에 상륙해 항구를 조기에 확보했다. 그리고 인천 남동부에 상륙해 인천을 고립시키는 것과 동시에 서울 방면에서 오는 북한군의 증원군을 차단했다.

  • 서울을 수복한 후 국군이 태극기를 게양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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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천상륙작전을 보도한 미국 신문
    『더 선(The Sun)』 1950년 9월 18일자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9월 28일: 서울을 되찾다

적의 허술한 태세를 틈타 인천에 상륙한 국군과 유엔군은 2,000명가량의 북한군을 제압하고 인천을 탈환했다. 3일 후부터는 김포와 영등포 두 방향으로 진출해 서울을 포위했고, 결국 9월 28일에 서울을 완전히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인천상륙작전은 6·25 전쟁의 판도를 바꾸는 데 공헌했다. 낙동강까지 밀리며 궁지에 몰렸던 국군과 유엔군은 이 작전을 계기로 주도권을 잡았다. 당시 한반도에서 이북과 이남을 오가는 대용량 수송이 가능한 교통수단은 모두 서울을 거쳐야 했다. 따라서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수복 성공은 곧 남쪽으로 진격했던 북한군에 대한 보급이 끊겼음은 물론,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과 인천~서울을 장악한 국군 및 유엔군에 포위됐음을 뜻했다. 이 작전의 성공 덕에 국군과 유엔군은 손실을 최소화하며 북한군의 사기를 떨어뜨릴 수 있었다. 많은 군사학자들도 이 작전을 20세기 역사상 최고의 군사작전이라 평한다.

다만 작전 성공 이후의 대응에는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도 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동쪽까지 점령해 한반도의 허리 전체를 장악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맥아더는 인천을 점령한 병력을 다시 원산행 배에 태워 원산상륙작전을 계획했으나, 그 과정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북한군이 재정비할 시간을 벌어주었다는 평이다. 더불어 작전 직전에 실행된 폭격으로 월미도 주민과 신원불명의 100여 명이 희생됐다는 점도 그렇다. 그럼에도 인천상륙작전 시작부터 서울을 수복한 약 2주간의 시간이 6·25 전쟁과 이후 오늘날의 역사를 크게 바꿨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인천상륙작전은 국군과 유엔군이 합세해 만들어낸 결정적 순간으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이달의 근현대사

월별 주요 일정
9

1

대한항공 여객기, 사할린 근처에서 격추(1983)

문화공보부, 영화 시나리오 검열 폐지(1987)

2

미국과 소련, 한반도 분할 점령 선언(1945)

5

포츠머스강화조약 체결로 러일전쟁 종전(1905)

11

이승만,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선출(1919)

17

한국광복군 창설(1940)

서울올림픽 개막(1988)

남북한 유엔 동시·분리 가입 승인(1991)

22

반민족행위처벌법 공포(1948)

남북 최초 직통전화 가설(1971)

10

1

새 주민등록법에 의한 주민등록 접수 시작(1968)

9

대한민국임시약헌 선포(1940)

『조선말 큰 사전』 첫 권 발간(1947)

15

대한민국 국기 제정(1949)

16

부마 민주 항쟁 시작(1979)

18

제1차 석유파동(1973)

19

여수·순천 사건 발생(1948)

25

중국군, 6·25 전쟁에 개입(1950)

26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 저격(1909)

박정희 전 대통령 사망(1979)

29

9차 개헌 공포, 대통령 직선제 채택(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