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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2월 16일 윤동주, 별을 헤다 별이 되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자 윤동주(尹東柱)는 1917년 만주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나 1945년 2월 16일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다짐하던 그는 결국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은 채 주어진 길을 걸어갔다. 스물여덟 청춘의 죽음과 그가 남긴 작품들은 이후 많은 사람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맑되 굳은 결기로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보고, 시가 쉽게 ‘씌어지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조국의 독립을 염원했던 그의 시편들은 오래도록 사람들 마음에 남아 있다. 지금 이후로도 오랫동안 기억될 윤동주의 이름을 부른다.

해처럼 빛났던 윤동주의 생애

윤동주의 아명은 해처럼 빛나라는 뜻의 ‘해환(海煥)’이다.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윤동주는 그의 아명처럼 빛나는 감수성을 기반으로 삶에 대한 고뇌와 독립에 대한 소망이 서린 작품들을 남겼다. 만주 북간도 명동촌 일대의 부유한 집안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일제에 저항하며 민족 지도자를 신앙으로 양육했던 외숙부, 김약연 목사, 항일과 통일 운동의 씨앗을 키운 문익환 목사 등 명동촌 사람들의 영향 속에서 자랐다. 당시 명동촌은 일본(日本)을 ‘왈본(曰本)’이라 다르게 부를 정도로 항일 의식이 강한 마을이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경성 연희전문학교(지금의 연세대학교)로 진학한다. 이 학교는 당시 민족주의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조선어를 가르쳤다고 하는데, 이것이 윤동주의 중요 입학 동기였다. 이후 그는 학업 열의를 보이며 일본으로 유학을 갔고, 그곳에서 사촌이자 단짝이었던 송몽규를 비롯한 조선인 유학생들과 함께 ‘조선인 유학생 그룹’ 활동에 집중한다. 당시 조선인 유학생 그룹은 무기와 군사지식을 통한 무력봉기를 주장하는 등 상당히 급진적인 학생운동 모임이었다.
일제 강점이라는 비극과 그의 주변 환경은 윤동주 작품 세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15세 때부터 시를 썼던 윤동주는 습작 시절에는 신변잡기 위주의 발랄한 시를 쓰다가 점차 조국의 현실과 삶에 대한 고뇌를 풀어냈다. 특히 연희전문학교 재학시절 그의 주제의식은 더 깊어졌으며 <별 헤는 밤>과 <서시>, <자화상> 등의 작품이 이 시절에 나왔다.

  • 사진 출처: 윤동주기념사업회 누리집

숫자로 보는 윤동주

  • 6개월

    윤동주가 생을 마감한 때는
    1945년 2월 16일로 광복을
    6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 28세

    1917년 태어난 그는
    1945년, 스물여덟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 1948년

    그의 유고시집은 사후
    1948년 31편을 모아
    출판됐다.

  • 116편

    이후 작품 수집을 통해 총
    116편이 모여 지금의 윤동주
    시집이 완성됐다.

  • 1990년

    1990년 대한민국은
    윤동주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키워드로 보는 윤동주

  • 명동촌

    그가 태어난 만주 북간도의
    마을. 그가 시인인 동시에
    독립운동가가 되는 기반을
    마련해준 고향이다.

  • 송몽규

    윤동주의 고종사촌이자
    단짝이었던 송몽규는 일본
    유학 중 윤동주와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45년
    3월 7일 옥사했다.

  • 연희전문학교

    1915년에 설립된 기독교 계열의
    사립 전문학교로 연세대학교의
    전신이다. 윤동주는 이곳에서
    시에 대한 깊이는 물론 독립운동
    의지를 키웠다.

별이 된 윤동주의 정신과 작품

윤동주는 1943년 ‘재교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으로 일본제국 경찰에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된다. 그리고 수감된 지 1년 7개월 만인 1945년 2월 16일, 건강 악화로 스물여덟의 생을 마감했다. 당시 일본인 간수의 증언에 의하면 윤동주는 죽기 직전 알아듣지 못할 짧은 말을 남기고 떠났다 한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겠지만 당시 간수는 마치 그가 ‘대한독립 만세’를 외친 것 같았다고 증언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불과 6개월 앞두고 일어난 애석한 죽음이었다. 이 죽음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생체실험 피해자’라는 것도 그중 하나다. 윤동주는 생전 정말 건강한 청년이었으나 형무소 복역 중 주사를 반복해서 맞으며 몸이 쇠약해졌다. 당시 일본군은 전쟁 승리를 위해 생리식염수 개발에 몰두하고 있었고, 형무소에 수감된 조선인들을 그 실험 대상으로 삼아 세균 주사를 놓았다는 것이다. 맑되 굳은 결기로 가득했던 스물여덟 청년은 일본의 형무소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았다.
윤동주 지인들은 생전 출판되지 못한 그의 시들을 모아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판(1948년)했고, 이 시집은 이후 저항정신의 상징이자 대한민국 시문학의 보석으로 평가받는다. 최초에는 31편으로 출간했으나 이후 윤동주의 여동생 윤혜원 씨가 윤동주의 미발표시 85편을 전달하며 총 116편이 실린 현재의 윤동주 시집이 완성됐다.
연희전문학교 시절 윤동주는 별 헤는 걸 즐겼던 모양이다. 시꺼먼 밤하늘에 보석 처럼 박힌 별들을 헤며 그는 추억과 사랑, 쓸쓸함, 어머니를 불렀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썼던 아이들과 비둘기, 강아지의 이름도 나지막이. 별을 헤며 고향을 그리워하다가도 그는 어쩌면 억압이 없는 독립된 조국을 꿈꾸지 않았을까. 별을 헤던 윤동주는 이제 별이 되어 밤하늘에 보석처럼 박혔다. 후대 사람들은 그 별들을 보며 윤동주와 그의 작품을 떠올리고, 더 나은 세상과 삶을 생각한다. 그렇게 그는 아주 오래도록 잊히지 않고 사람들 사이에서 수줍지만 맑은 웃음을 지으며 서성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