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직하다

자주 독립을
꿈꾸던 그 소원은

백범 김구는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하이로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에 올랐고, 1940년에는 국무위원회 주석에 취임했다.
이번 호에서는 소장자료를 중심으로 김구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살펴본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에서 사용한 태극기
  • 광복을 맞이하기까지

    1876년 황해도에서 태어난 김구는 자존심과 저항정신이 강한 아버지, 강한 신념을 지닌 어머니 밑에서 부패한 세태를 참지 못하는 혈기 넘치는 사내로 자랐다. 의병부대에 몸을 담기도 했던 그는 일제강점 이후 줄곧 항일운동에 전력했다. 1919년 3·1 운동후에는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피해 상하이로 망명했고 같은해 4월 11일에 설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1) 자리에 오른다. 1923년 내무 총장, 1924년 국무총리 대리, 1926년 국무령을 거쳐 1940년에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에 취임했다.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합류 전에도 항일운동에 힘썼지만, 합류 이후에는 조금 더 치밀하게 준비해 조직적으로 움직이며 각종 항일운동을 진두지휘했다. 1919년 4월에는 신한청년당에 가담했고 1922년 10월에는 독립전쟁이 발발할 시 참전하기 위해 군인을 양성하는 한국노병회를 조직했다. 1928년 3월에는 안창호, 송병조 등 민족주의 계열 인사들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조직했고, 1931년 임시정부의 국무령으로 활동할 때에는 일제의 주요 인물을 암살하려는 목적으로 한인애국단을 결성했다. 한인애국단의 가장 큰 활동으로는 흔히 두 가지가 손꼽힌다. 1932년 1월 8일 일본에서 이봉창이 당시 일왕이던 히로이토(裕仁)를 암살하고자 폭탄을 투하했으나 실패한 사건, 1932년 중국 상하이 훙커우공원(虹口公園)에서 윤봉길이 폭탄을 던져 일본인 여럿을 사살하거나 중상을 입힌 사건이 그것이다. 두 사건 모두 김구가 중심이 돼 진행됐다.
    이후 중국과 결탁해 한인무관양성소를 특설했고, 1940년에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의 최고 자리인 주석에 취임한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대인 한국광복군을 조직했다. 1944년 임시정부 주석 재선에 성공한 김구는 한국광복군의 군사훈련을 추진하고 지휘하던 중 기쁜 소식을 접한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찾아온 것이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제정한 임시 헌법 조항을 기록한 『대한민국 임시 약헌』
  • 1944년 4월 2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입법기관인 임시의정원의 「제36차 임시회의 선언서」.
    임시정부의 주석(김구)과 부주석(김규식), 국무위원(이시영, 김붕준, 김원봉 등)을 선출한 회의 결과가 인쇄돼 있다.

광복 이후 활동

김구는 194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제1진으로 환국했다. 하지만 그가 원하는 조국은 아니었다. 미국과 소련 등 강대국은 한반도에 38선을 그었다. 이에 김구는 현재 우리에게 잘 알려진 「나의 소원」은 물론 1948년 2월 발표한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등의 글을 통해 신탁 통치 반대와 완전 자주 독립노선을 통한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당시 남한은 남한 단독정부를 주장하는 이승만 계열과 자주 독립 및 통일정부를 주장하는 김구·김규식 계열로 쪼개져 극심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김구는 1948년 김규식과 함께 평양을 방문해 ‘남북협상 4자회담’을 진행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돌아왔다.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민족 통일 운동에 힘쓰다가 1949년 암살당하며 생을 마감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하며 임시정부가 해산됐으니 김구는 임시정부와 비슷한 운명을 맞이했던 셈이다.
김구의 주장이 현실이 됐으면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떨까 상상해본다. 강대국의 진영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자주 독립을 했다면, 38선과 비무장지대(DMZ)는 지난 시대의 전설로만 전해지지 않았을까. 김구가 자주 독립과 통일정부를 꿈꾸던 그때에서 우리는 너무 멀리 와 있다. 하지만 그 가치만큼은 지금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다.

  • 1986년 6월 10일 발행한 김구 보통 우표
  • 1947년 7월 김구가 이시영, 조성환 등과 함께 인덕을 쌓자는 취지로 만든 보인계의 출자금이 기록된 기본출자부(왼쪽)와 법률이나 규정 따위가 적힌 절목(節目). 이는 국내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보인계와 관련된 자료로써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통해 2018년 최초로 공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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