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역사박물관 National Museum Of Korean Contemporary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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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소장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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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3.1운동 기념대회 전단
자료형태 문서 시대/연도 광복~1950년대 / 1946년
규격 20.9×17.4 / 27.4×19.1
한줄설명 해방 이후 좌우 정파에 의해 주도된 3.1운동 기념대회 개최와 관련된 전단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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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회합과 학생 대표들의 기미독립선언서 낭독을 기점으로 시작된 3.1운동은 ‘무단통치’라는 용어로 대표되는 일제의 잔혹한 식민 통치에 항거하는 전국적인 운동으로 발전하였으며, 이를 통해 이전 시기와 구분되는 한국인의 근대적 민족 의식과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대표되는 구체화·조직화된 독립운동 단체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위상으로 말미암아, 3.1운동은 1945년까지 지속된 일제강점기의 와중에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하여 ‘한국인의 독립 정신’을 나타내는 표상으로써 매년 기념되었다. 해방 이후 3.1운동에 대한 경의는 공식화되어, 38선 이남에 진주한 미군정 역시 1946년 2월 21일 군정법률 제2호 「경축일 공포의 관한 건」을 통해 3월 1일을 대한독립이 최초로 선언된 날이자, 그 대의를 위해 스러져간 애국자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날로 지정하였다.
 그러나 한민족을 대표하는 기념일 중 하나인 삼일절도 해방과 함께 찾아온 분단을 피해갈 수 없었다. 1945년 12월의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수면 위로 드러난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론은 한국인들을 찬탁과 반탁, 좌익과 우익으로 갈라놓았고, 각 진영을 대표하는 단체들은 정치적·사회적 현안의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대립하였다. 1946년의 삼일절 기념식 역시 이러한 이념의 전장이었다. 반탁운동을 주도하던 우익 세력은 김구, 이승만 등 임시정부 요인들이 이끌고 있었으며, 임시정부의 권위 계승을 강조하였다. 당연하게도 우익 세력은 임시정부의 기념일이었던 3.1절을 중요시했고, 해방 이후 처음으로 조국 땅에서 맞는 3.1절 행사를 성대하게 치르고자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南朝鮮大韓國民代表民主議院, 이하 민주의원)과 반탁전국학생총연맹 등 반탁·우익 청년단체를 중심으로 기미독립선언기념전국대회(己未獨立宣言記念全國大會)를 준비하였다.
 한편, 좌익 세력은 3.1운동이 가지는 반제국주의 투쟁, 노동자·농민 혁명으로서의 성격에 주목하여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행사를 추진하기 위한 3.1기념전국준비위원회(三一記念全國準備委員會)를 창설하였다.
 둘로 나뉜 3.1운동 기념행사와 좌우 대립의 모습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소장 중인 당시 전단 자료들을 통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전단의 내용을 살펴보면, 한발 앞서 전국대회를 추진한 우익 진영은 그 장소를 서울운동장(지금의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및 디자인플라자)으로 한 반면, 좌익 진영은 남산공원을 행사장으로 선정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장소부터 나누어진 가운데, 양측 전단의 구호들은 상대를 겨냥한 비난의 포문을 열었다. 우익 진영은 좌익 진영의 남산 집회를 선량한 시민을 속여 신탁통치 지지 행렬로 둔갑시키려는 매국노들의 음모라고 비난하였고, 좌익 진영 역시 우익 진영 쪽에서 통합 행사 추진에 관심을 보이지 않으며, 맹목적 반탁으로 연합국의 결정을 존중하지 않아 오히려 독립을 방해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첨예한 대립을 봉합하려는 시도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 서울 소재 언론사들을 중심으로 하여 모든 정치단체가 포함된 단일한 조직 하의 3.1운동 기념대회를 추진하고자 하는 방안이 모색되었지만, 행사의 주도권과 3.1운동에 대한 입장, 당시 정치적 현안에 대한 견해차를 좁히지 못했다. 결국 1946년의 기념행사는 분열된 채로 진행되어, 민주의원과 미군정 인사들이 참여한 기념식은 종로 보신각에서, 시민대회는 예정된 대로 각각 서울운동장과 남산공원에서 개최되었다. 이렇게 좌우로 쪼개진 3.1절 기념행사는 1947년에 다시 한 번 반복되었고, 급기야는 양측의 충돌과 경찰의 발포로 인해 사상자까지 다수 발생하는 비극이 연출되었다. 그 이후 미소공동위원회가 완전히 결렬되고 남북이 모두 단일정부를 수립함에 따라 하나된 3.1운동 기념행사는 요원한 일이 되었고, 그것이 지금에 이르렀다. 해방 후 처음으로 맞이한 삼일절이 조국의 분단을 암시하는 복선이 되고 만 것이다.

 

참고문헌

윤대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3·1절 기념과 3·1운동 인식」, 『한국독립운동사연구』57, 2017, pp.53~84
오은아,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의 결성과 항일공연예술 활동」, 『한국근현대사연구』87, 2018, pp.323~360
박명수, 「1946년 3·1절: 해방 후 첫 번째 역사논쟁」, 『한국정치외교사논총』38, 2016, pp.85~122
국가기록원 홈페이지(http://theme.archives.go.kr/next/koreaOfRecord/3_1.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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